“빚을 지지도 말고, 돈을 빌려주지도 마라.”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햄릿》
친구에게 처음 돈을 빌려준 건
그리 큰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꽤 오래된 사이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가끔 술도 마셨고,
서로의 연애 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이사를 했을 때는 친구가 하루 종일 도와줬다.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달려갔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친구에게 연락이 왔을 때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혹시 지금 통화 돼?”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돈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달 카드값과 월세가 겹쳤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한 지출도 몇 개 생겼다고 했다.
“진짜 미안한데 백오십만 원만 가능할까?”
적은 돈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친구가 바로 덧붙였다.
“다음 달 월급 들어오면 바로 갚을게.”

나는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당장 쓸 돈은 아니었다.
비상금으로 모아둔 돈이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보내기로 했다.
오래된 친구에게
차용증을 쓰자고 말하는 것도 괜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돈을 보내고 말했다.
“다음 달에만 꼭 줘.”
친구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진짜 고맙다.”
“내가 꼭 갚을게.”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날 밤에는 오히려 마음이 좋았다.
힘든 친구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월급날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친구가 먼저 기억해서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월급날이 지났다.
아무 연락이 없었다.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리고 또 하루를 기다렸다.
그래도 연락은 없었다.
나는 괜히 휴대전화를 자주 확인했다.
돈이 급해서가 아니었다.
친구가 기억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사흘째 되는 날 내가 먼저 연락했다.
“전에 빌려준 돈 있잖아.”
친구는 금방 답했다.
“아 맞다.”
그 짧은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친구는 이번 달에도 사정이 좋지 않다고 했다.
갑자기 보험료가 나갔고,
부모님께 드릴 돈도 생겼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진짜 줄게.”
나는 알겠다고 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나 역시 돈이 꼬였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친구의 SNS에서 여행 사진을 보게 됐다.
주말에 가까운 곳으로 놀러 간 사진이었다.
비싼 호텔은 아니었다.
큰돈을 쓴 여행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돈을 빌린 사람이 여행을 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갚을 돈이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사진을 몇 장 넘기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내가 너무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친구가 어디를 가든 그건 친구의 생활이었다.
다만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씩 다른 생각이 생겼다.
나는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는 내 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까.
다음 달이 됐다.
이번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며칠을 기다린 뒤 다시 말했다.
“이번 달에는 가능해?”
이번에는 답장이 한참 뒤에 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돼?”
나는 물었다.
“얼마나?”
친구는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정리되는 대로 줄게.”
그 말이 가장 답답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는 말했다.
“나도 계획이 있어서 그래.
날짜를 정해줬으면 좋겠어.”
친구의 답장이 늦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짧은 메시지가 왔다.
“너 돈 급해?”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돈이 급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돈이었다.
약속한 날짜가 지났고,
나는 두 달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돈을 달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빼고 답장했다.
“급하고 아니 고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한 날짜가 지났잖아.”
친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늦게 메시지가 하나 왔다.
“알겠어. 이번 달 안에는 줄게.”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리 연락은 눈에 띄게 줄었다.
예전에는 사소한 이야기도 자주 주고받았다.
그런 연락이 사라졌다.
내가 먼저 연락하면 친구는 평소처럼 답했다.
하지만 나도 친구도 불편한 것 같았다.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대화 사이에 돈이 있었다.
“주말에 뭐 해?”
그렇게 묻고 싶다가도
괜히 돈 이야기 때문에 연락한 것으로 보일까 싶어 메시지를 지웠다.
친구도 비슷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어느 토요일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였다.
나도 나갔다.
문제의 친구도 왔다.
우리는 처음에는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누가 이직을 한다는 이야기,
누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
요즘 물가가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다 한 친구가 새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들 휴대전화를 구경했다.
그 친구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도 이번에 바꾸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내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잠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친구는 내게 말했다.
“왜?”
“뭐가?”
“표정이 왜 그래?”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친구가 다시 말했다.
“휴대폰 바꾼다고 하니까 돈부터 생각났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당황했다.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은 친구였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친구는 피식 웃었다.
“아니, 네 표정이 그렇잖아.”
그 순간 참고 있던 것이 조금 올라왔다.
“그럼 솔직히 말할까?”
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돈 빌리고 몇 달째 정확한 날짜도 말 안 해주면서 새 휴대폰 산다는 얘기 들으면 좋게 들리지는 않지.”
친구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들 있는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처음 돈 이야기를 꺼낸 것도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새 사람들 앞에서 돈을 독촉한 사람은 내가 되어 있었다.
친구는 말했다.
“내가 안 갚겠다고 했어?”
“안 갚는다고 한 건 아니지.”
“그럼 기다리면 되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물었다.
“언제까지?”
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모임은 이상하게 빨리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엉망이었다.
왜 내가 친구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싶었다.
오래된 친구인데 돈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말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한 가지가 걸렸다.
나는 돈을 빌려준 뒤 친구의 사정을 계속 생각했다.
친구는 돈을 빌린 뒤 내 입장을 얼마나 생각했을까.
며칠 뒤 친구에게 긴 메시지가 왔다.
“요즘 네가 돈 얘기할 때마다
사람을 되게 작아지게 만든다.”
나는 한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몇 번 쓰다가 지웠다.
결국 짧게 보냈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근데 나도 계속 기다리는 입장이 편한 건 아니야.”
친구는 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 우리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돈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친구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감정적인 말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한 번에 어렵다면 나눠서 갚아도 돼.
대신 매달 얼마씩 갚을지 날짜만 정해줘.”
다음 날 답장이 왔다.
친구는 매달 삼십만 원씩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돈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삼십만 원.
두 번째 삼십만 원.
세 번째 삼십만 원.
입금 알림이 올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돈을 돌려받고 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입금 확인 뒤
“고마워.”
라고 말했을 텐데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 뒤 마지막 돈이 들어왔다.
친구는 함께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다 갚았다.”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했다.
“확인했어.”
그게 끝이었다.
백오십만 원은 모두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언가 더 큰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뒤 친구의 생일이 왔다.
예전에는 자정이 되면 서로 먼저 축하해 줬다.
그날도 휴대전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메시지를 쓸까 생각했다.
결국 오후가 되어서야
“생일 축하해.”라고 보냈다.
친구는 한 시간 뒤 답했다.
“고마워.”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몇 달 뒤 우리는 다른 친구의 결혼식에서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친구는 나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도.”
우리는 그것보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밤새 이야기해도 시간이 부족했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몇 문장만으로 대화가 끝났다.
친구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갔다.
나는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돈 때문에 친구를 잃은 걸까.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돈이 우리 관계를 망가뜨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돈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했던 것이 드러난 것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라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친구라면 조금 늦어도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갚지 않는 시간이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돈을 재촉하는 행동을 우정의 부족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
같은 일을 두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는 참다가 화가 났고,
친구는 미루다가 방어적으로 변했다.
돈은 결국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좋았던 기억도 많다.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일도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그 관계 전체를 나쁜 관계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배웠다.
돈을 빌려줄 때는 상대를 믿는 것만큼 약속을 분명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돈 때문에 관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갚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다.
돈이 부족할 수는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먼저 말해야 한다.
“이번 달에는 어렵다.”
“이 날짜까지는 꼭 주겠다.”
“미안하다.”
그 몇 마디가 돈보다 중요한 순간도 있다.
사람이 서운해지는 것은 돈이 늦게 돌아와서만이 아니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 마음이 먼저 멀어진다.
나는 이제 누군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예전처럼 쉽게 “그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돈이 아까워서만은 아니다.
돈을 빌려주는 순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돈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때 친구가 약속한 날 먼저 연락해서
“미안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지금도 친구였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서로를 믿던 예전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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