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possesses not nor would it be possessed.”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되려 하지도 않는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사랑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그녀가 내 옷깃을 바로잡아줄 때, 나는 조금 웃었다.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자마자 그녀는 늘 내 어깨를 한번 훑어보고,
목도리가 삐뚤어졌는지,
머리가 눌리진 않았는지,
코트에 먼지가 묻진 않았는지 살폈다.
“또 머리 안 말리고 나왔지?”
“말렸어.”
“말리긴 뭘 말려. 여기 아직 축축한데.”
그녀는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다.
나는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자세히 보고 있다는 게,
내가 대충 지나친 나의 하루까지 누군가 챙겨준다는 게.
연애 초반에는 그런 말들이 다정하게 들렸다.
“밥은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김밥.”
“아니, 또 김밥? 제대로 먹어야지.
맨날 그렇게 먹으니까 얼굴이 푸석하지.”
그녀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내 앞에 따뜻한 국물 있는 음식을 밀어주곤 했다.
나는 젓가락을 들며 웃었다.
“너 진짜 우리 엄마 같다.”
그러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지금 여자친구로서 걱정하는 거거든?”
“알아. 그래서 고맙다고.”
그때는 정말 고마웠다.
혼자 살면서 내 생활은 대체로 엉망이었다.
아침은 거르기 일쑤였고,
점심은 편의점에서 대충 때웠고,
저녁은 야근이 끝난 시간에 따라 라면이 되거나 치킨이 되었다.
집에는 세탁하지 않은 셔츠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냉장고에는 물과 오래된 소스 몇 개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내 생활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너 이렇게 살면 나중에 큰일 나.”
“아직 큰일 안 났잖아.”
“큰일은 원래 안 난 척하다가 한 번에 나.”
그녀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눈빛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건강을 걱정하는 게 느껴졌고,
내 생활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도 알았다.
처음 몇 달 동안 나는 그녀 덕분에 조금 달라졌다.
아침을 먹기 시작했고,
빨래를 미루지 않으려고 했고,
퇴근 후 소파에 쓰러지기 전에 샤워부터 했다.
그녀는 그런 변화를 볼 때마다 뿌듯해했다.
“봐. 사람이 이렇게 깔끔해질 수 있다니까.”
“내가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한다?”
“거의 반쯤은 아니었지.”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장난처럼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말들이 조금씩 장난이 아니게 되면서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점검하는 사람처럼 변해갔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안 했는지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 물 몇 잔 마셨어?”
“모르겠는데.”
“모르겠다는 게 말이 돼? 너 또 커피만 마셨지?”
“아침에 한 잔, 오후에 한 잔.”
“두 잔이나 마셨어? 속 버린다니까.”
“그 정도는 괜찮아.”
“네가 뭘 알아. 맨날 몸 안 챙기면서.”
처음에는 대답했다. 나름대로 설명했다.
오늘은 회의가 많아서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점심은 제대로 먹었다고, 물도 틈틈이 마셨다고.
그런데 설명은 점점 변명이 되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기보다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너는 항상 그래.”
“내가 항상 그런 건 아니잖아.”
“아니야. 너는 누가 말 안 하면 절대 안 해.”
그 말이 어느 날부터 마음에 걸렸다.
누가 말 안 하면 절대 안 하는 사람.
그녀의 말속에서 나는 점점 어른이 아니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달랐다.
나는 팀에서 꽤 책임 있는 일을 맡고 있었다.
실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 일을 방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후배들이 물어보면 답해주었고,
야근이 필요하면 남았고,
문제가 생기면 수습했다.
사람들은 나를 무난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 앞에만 서면 나는 이상하게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셔츠 다림질은 했어?”
“했어.”
“근데 왜 이렇게 구겨졌어?”
“입고 오면서 좀 구겨졌겠지.”
“그러니까 옷을 잘 걸어놨어야지.”
“걸어놨어.”
“그럼 네가 입는 습관이 문제인가 보다.”
나는 그 말에 웃지 못했다.
습관이 문제.
그녀는 모든 것을 내 문제로 돌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피곤한 것도,
밥을 대충 먹는 것도,
옷이 구겨지는 것도,
연락이 늦는 것도,
감기에 걸리는 것도,
집이 조금 어질러져 있는 것도,
결국은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긴 일처럼 말했다.
“감기 걸렸다며?”
“응. 목이 좀 아파.”
“그러니까 내가 목도리 하고 다니라 그랬잖아.”
“하고 다녔어.”
“근데 왜 걸려?”
나는 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가 잠깐 눈을 감았다.
아픈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많이 아파?
약은 먹었어?
오늘은 일찍 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의 첫마디는 늘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였다.
그 말은 걱정처럼 포장되어 있었지만,
내게는 꾸중처럼 들렸다.
나는 점점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감기에 걸려도 말하지 않았고,
야근이 길어져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하면 위로보다 해결책이 먼저 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는 너무 사람들한테 맞춰줘.”
“그러니까 팀장한테 바로 말했어야지.”
“그러니까 그런 회사는 빨리 나와야 된다니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문제는 맞고 틀리고가 아니었다.
나는 정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오늘 하루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면 곧장 내 행동을 평가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하루를 짧게 줄였다.
“오늘 어땠어?”
“그냥.”
“또 그냥이야?”
“응. 별일 없었어.”
사실 별일은 많았다.
상사가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일을 밀어붙였고,
후배가 실수한 자료를 내가 다시 정리했고,
점심시간에는 혼자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었다.
오후에는 머리가 아팠고,
퇴근길에는 버스가 너무 막혀서 한 정거장 전에 내려걸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내가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하면 그녀는 또 잔소리할 것이고,
머리가 아팠다고 하면 “그러니까 잠을 일찍 자랐잖아”라고 할 것이고,
버스에서 내려걸었다고 하면 “비 오는데 왜 걸었어?”라고 할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많이 신경 썼다.
내 건강검진 날짜를 기억했고,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다 주었다.
그리고 집에 들르면 냉장고를 확인했다.
“이거 유통기한 지났어.”
“그래?”
“진짜 너는 냉장고를 왜 이렇게 방치해?”
그녀는 냉장고 앞에 서서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것도 버려야 되고,
이것도 버려야 되고.
이건 대체 언제 산 거야?”
“기억 안 나.”
“그러니까 문제지.”
나는 소파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분명 나를 위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편하지 않았다.
내 집인데도 내가 검사받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내가 정리할게.”
“네가 언제?”
“주말에.”
“너 주말 되면 또 피곤하다고 누워 있을 거잖아.”
“아니, 할게.”
“됐다. 내가 하는 게 빠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냉장고를 정리했다.
나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하지 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고마움과 불편함은 이상하게 같이 올 때가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움직이는 건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집에 올 때마다 무언가를 확인했다.
세탁기는 돌렸는지,
분리수거는 했는지,
화장실 청소는 했는지,
영양제는 먹었는지,
보일러는 몇 도로 맞췄는지,
이불은 언제 빨았는지.

“너 이불 냄새나.”
“그 정도야?”
“응. 이런 데서 어떻게 자?”
그녀가 말하는 순간,
나는 괜히 내 침대가 부끄러워졌다.
혼자 살며 나름대로 버텨온 생활이
그녀 앞에서는 자꾸만 잘못된 답안지처럼 펼쳐졌다.
어느 날은 그녀가 내 옷장을 열어보다가 말했다.
“너 옷 진짜 없다.”
“회사 다닐 때 입는 건 충분한데.”
“아니, 데이트할 때 맨날 비슷하게 입잖아.”
“그게 편해서.”
“편하다고 아무거나 입고 나오면 어떡해.
옆에 있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그 말에 나는 가만히 그녀를 봤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었어?”
그녀는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좀 신경 쓰라는 거지.”
“신경 쓰고 나온 건데.”
“그럼 더 문제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뒤로 데이트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그건 너무 칙칙해.
그 바지는 또 입어?
머리는 왜 그렇게 했어?
신발 좀 닦고 다녀.
나는 나를 꾸미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점검하는 사람이 되었다.
연애가 이렇게 피곤한 일이었나.
그 생각을 처음 한 날,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여전히 그녀가 웃으면 좋았고,
만나기 전날이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다.
맛있는 식당을 보면 그녀를 데려가고 싶었고,
예쁜 컵을 보면 그녀 생각이 났다.
그런데 만남이 가까워질수록 긴장도 함께 찾아왔다.
오늘은 뭘 지적받을까.
내가 또 뭘 잘못했을까.
그녀가 기분 좋게 웃다가도 갑자기 내 말투나 행동을 고칠까 봐,
나는 자꾸 내 행동을 의식했다.
식당에서 물을 따를 때도 조심했고,
메뉴를 고를 때도 “아무거나”라고 하지 않으려 했다.
식사 중 휴대폰을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꺼내지 않았고,
음식을 남기면 또 한마디 들을까 봐 배가 불러도 조금 더 먹었다.
그녀는 내 변화를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점 나답지 않아 졌다.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 앞에서였다.
둘만 있을 때의 잔소리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눌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나 지인들 앞에서
그녀가 나를 고쳐 말하기 시작하면 나는 견디기 어려웠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우리는 내 대학 동기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래전부터 보자고 했던 자리였다.
나는 오랜만에 편한 사람들을 만난다고 생각해서 조금 들떠 있었다.
동기가 물었다.
“요즘 회사는 어때?”
“뭐, 비슷하지. 일이 좀 많긴 한데—”
내가 말을 이어가려는데 그녀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얘는 일이 많은 것도 많은 건데,
자기 관리를 너무 안 해요.
맨날 늦게 자고, 밥도 대충 먹고.”
동기의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좋네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가 안 챙기면 진짜 큰일 나요.
영양제도 제가 말해야 먹고,
병원도 가라고 해야 가고,
집도 제가 봐줘야 돼요.”
사람들은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속은 웃지 않았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동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너 거의 애 하나 키우는 거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큰아들 키우는 기분이에요.”
그 순간, 식탁 위의 공기가 이상하게 멀어졌다.
큰아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말이었을 것이다.
사람들도 악의 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날 내가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녀가 돌봐야 하는 부족한 사람으로 소개된 것 같았다.
그 뒤로 대화는 이어졌지만, 나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녀는 중간중간 내 접시를 보며 말했다.
“야채도 좀 먹어.”
“소스 너무 많이 찍지 마.”
“또 물 안 마신다.”
나는 사람들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점점 굳어가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 재밌었다. 네 친구 괜찮더라.”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았다.
“응.”
“왜 이렇게 조용해?”
“피곤해서.”
“또 피곤해? 어제 몇 시에 잤는데?”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조금 세게 밟았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그녀가 나를 봤다.
“왜 그래?”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 좀 안 하면 안 돼?”
“무슨 말?”
“또 피곤해? 어제 몇 시에 잤는데? 이런 말.”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잖아.”
“알아.”
“근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나는 오늘 네 남자친구로 간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근데 너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계속 혼냈어.”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언제 혼냈어?”
“아까 식당에서.”
“그게 혼낸 거야? 그냥 장난한 거잖아.”
나는 그 말을 예상했었다.
그냥 장난.
그녀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이었다.
“큰아들 키우는 기분이라고 했잖아.”
“그건 웃자고 한 말이지. 사람들이 다 웃었잖아.”
“나는 안 웃겼어.”
차 안에 잠시 침묵이 생겼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해?”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들은 사람처럼 피곤해졌다.
“예민한 게 아니라 싫은 거야.”
“뭐가 그렇게 싫은데?”
“네가 나를 계속 고치려는 거.”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고치려는 게 아니라 챙기는 거야.
너 진짜 혼자 두면 엉망으로 살잖아.”
“그 말이 싫다고.”
“사실이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라는 말은 때때로 가장 잔인하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 아프다.
내 생활이 완벽하지 않은 것도 맞고,
내가 때로 대충 사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었던 건 평가가 아니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부족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는 내가 왜 기분 나쁜지 정말 모르겠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는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그 말에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나를 위해 말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녀도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한다는 말이 항상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어.”
나는 작게 말했다.
“뭘 알겠는데?”
“그냥. 오늘은 그만 얘기하자.”
그녀는 화가 난 듯 팔짱을 꼈다.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우리는 평소보다 덜 연락했다.
그녀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화났어?’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답했다.
‘화난 건 아니야. 그냥 생각이 많아.’
곧바로 답이 왔다.
‘생각 좀 그만해. 네가 너무 깊게 생각해서 문제야.’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늘 그랬다.
내 감정에 이유가 있다고 보기보다,
내가 생각이 많아서 생긴 문제라고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우리의 대화가 어딘가에서
계속 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벽은 그녀의 나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걱정, 나의 침묵, 그녀의 확신,
나의 피로가 조금씩 쌓여 만든 벽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건 그다음 주였다.
그날은 내가 회사에서 중요한 발표를 한 날이었다.
몇 달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였고,
결과가 꽤 좋았다.
임원 앞에서 하는 발표라 며칠 전부터 긴장했는데,
다행히 큰 문제없이 끝났다.
팀장은 드물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잘했다.”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잘했다.
최근에 누군가에게 그렇게 들은 적이 있었나.
나는 퇴근길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발표 잘 끝났어.”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다행이다.”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응. 팀장도 잘했다고 했어.”
“봐. 내가 어제 일찍 자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잘 된 거야.”
나는 잠깐 멈췄다.
그녀는 기분 좋게 말한 것일 것이다.
정말로 내 성공을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내 성취를 그녀의 관리 결과처럼 만들었다.
내가 노력해서 잘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시킨 대로 해서 잘한 것처럼.
나는 대답이 늦었다.
“왜 말이 없어?”
“아니야.”
“오늘 저녁 뭐 먹을 거야? 또 대충 먹지 말고.”
“오늘은 팀 사람들이랑 간단히 먹고 들어갈 것 같아.”
“술 마셔?”
“아마 맥주 한잔 정도.”
“한잔만 해. 너 술 마시면 얼굴 붓잖아.
그리고 늦게 들어가지 말고. 내일 출근해야지.”
나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 오늘 잘했다고 말 듣고 싶었어.”
내가 말했다.
그녀가 잠깐 조용해졌다.
“방금 다행이라고 했잖아.”
“응.”
“근데 또 뭐가 부족해?”
또.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또 뭐가 부족해.
나는 늘 무언가 부족한 사람인가.
그날 저녁, 나는 팀 사람들과 맥주를 마셨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분은 좋지 않았다.
후배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도 나는 자꾸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누가 말 안 하면 안 해.
큰아들 키우는 기분이야.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또 뭐가 부족해?
집에 돌아왔을 때 밤 10시 반이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굳어 있었다.
“집.”
“왜 전화를 안 받아?”
“지하철이라 못 받았어.”
“아까 몇 시에 끝난 건데?”
“아홉 시 반쯤.”
“그럼 바로 연락했어야지.”
나는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
“나 오늘 좀 피곤해.”
“피곤한 건 알겠는데,
연락은 해야지. 그리고 술은 얼마나 마셨어?”
“맥주 한잔.”
“진짜 한잔?”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믿지 않는 질문.
“응. 한잔.”
“씻고 바로 자. 내일 늦잠 자지 말고. 알람 맞춰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끊어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화도 크게 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깊은 곳에서 지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 이제 그런 말 듣기 싫어.”
그녀가 잠시 멈췄다.
“뭐?”
“씻어라, 자라, 알람 맞춰라, 술 마시지 마라,
밥 먹어라, 옷 제대로 입어라, 집 치워라. 그런 말들.”
“너 지금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에 짜증 내는 거야?”
“응.”
나는 처음으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짜증 나.”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진짜 너무하네.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러는데?”
“나 좋으라고 하는 거겠지.”
“알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근데 나는 안 좋아.”
그녀는 말을 멈췄다.
나는 벽에 기대섰다. 집 안은 조용했다.
신발장 위에 놓인 우편물 몇 개, 싱크대에 놓인 컵 하나,
의자 위에 걸린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보면 또 한마디 할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 풍경이 이상하게 나를 안쓰럽게 만들었다.
이게 내 삶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내가 버티고 살아온 삶.
그녀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매번 고쳐야 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삶.
“나는 네 아들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네가 키우는 사람이 아니야.
챙겨줘서 고마운 적 많았어. 진심이야.
그런데 요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지,
관리하는 건지 모르겠어.”
“관리?”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널 관리한다고?”
“응. 나는 그렇게 느껴.”
“와, 진짜 서운하다.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데.
네 건강 챙기고, 생활 챙기고,
좋은 쪽으로 바뀌라고 말해준 건데 그걸 관리라고 해?”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어.”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근데 나는 그 말들 때문에 점점 너를 만나는 게 긴장돼.”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더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번에도 멈추면, 나는 또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를 만나기 전에 옷을 몇 번씩 확인해.
밥 먹을 때도 네가 뭐라고 할까 봐 신경 써.
아프면 네가 걱정해 줄까 생각하기보다 혼낼까 봐 말하기 싫어져.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네가 해결책부터 말할 것 같아서 그냥 별일 없다고 해.”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게 연애인지 검사받는 건지 모르겠어.”
그녀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아니.”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가끔은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어.”
“듣고 있잖아.”
“아니. 듣기 전에 고치려고 하잖아.”
그녀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 침묵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말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걱정되면 말해야 되고,
잘못된 거 보면 못 지나쳐.
그게 나야. 너도 그거 알고 만난 거 아니야?”
맞다.
나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만났다.
꼼꼼하고, 책임감 있고,
마음에 걸리는 걸 쉽게 넘기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좋았던 때도 많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계속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알고 만났지.”
내가 말했다.
“근데 나도 이런 사람이야.”
“뭐?”
“부족해도 내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
가끔 대충 먹고, 피곤하면 집 좀 어질러 놓고,
실수도 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네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 고마워.
그런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전에,
네 앞에서 그냥 나로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무서웠다.
그녀가 울고 있을까 봐,
화를 내고 있을까 봐,
혹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봐.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헤어지자는 말 하는 거야?”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말하고 싶었다.
힘들다고, 숨이 막힌다고,
내가 혼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런데 그녀의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우리가 이미 꽤 멀리 와 있다는 걸 알았다.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지금은 모르겠어.
근데 이대로는 못 만나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럼 시간을 갖자는 거야?”
“응.”
내가 겨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녀는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가 잘못했다는 거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근데 그렇게 들려.”
“나는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네 방식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거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붙잡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또 내 감정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스트레스가 충분히 큰지,
내가 예민한 게 아닌지,
그녀가 정말 나를 힘들게 했는지.
그 증명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끊을게.”
내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소리만 낮게 울렸다.
나는 현관에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는 며칠 전 벗어둔 후드티가 있었다.
싱크대에는 컵 하나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정리하지 못한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녀라면 분명 한숨부터 쉬었을 풍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이상하게 안도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혼나지 않는 공간.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바로잡히지 않아도 되는 공간.
나는 후드티를 접지 않았다.
컵도 바로 씻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천장을 보았다.
휴대폰은 조용했다.
그녀에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좋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그녀가 없으면 허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챙겨주던 것들이 사라지면
내 생활은 다시 조금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아침을 거를 수도 있고,
빨래를 미룰 수도 있고,
몸이 아파도 병원을 늦게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훈육받고 싶은 게 아니라.
걱정받고 싶었다.
관리받고 싶은 게 아니라.
함께 있고 싶었다.
고쳐져야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 뒤,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가 너무 심했어?’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답했을 것이다.
아니야. 나도 예민했어.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또 같은 말에 상처받고,
또 같은 표정으로 웃고,
또 혼자 지쳤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참 뒤에 답장을 썼다.
‘너는 나를 많이 걱정해 줬어. 그건 알아.
그런데 걱정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가 평가가 되면 듣는 사람은
사랑받는 게 아니라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져.’
전송 버튼을 누르고도 한참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의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비였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문득 그녀가 처음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또 안 말리고 나왔지?”라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웃었다.
사랑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말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들린다.
처음에는 걱정이었던 말이, 어느 순간 평가가 된다.
처음에는 다정했던 손길이, 어느 순간 점검이 된다.
처음에는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느꼈던 그녀가,
어느 순간 나를 자꾸 부족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나빠서만은 아니었다.
나도 너무 오래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놓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마 이런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마워. 그런데 나는 혼나는 느낌이 들어.”
나에게는 아마 이런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걱정돼서 그랬어.
하지만 네가 힘들었다면 내가 듣는 방식을 바꿔볼게.”
그 말들이 너무 늦지 않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의 답장이었다.
‘나는 걱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멈춰 있었다.
잠시 뒤 하나가 더 왔다.
‘근데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내 방식이 틀렸던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조용히 흔들렸다.
사과라고 하기엔 조심스러웠고,
화해라고 하기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으로 그녀가
내 말을 평가하지 않고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우리가 괜찮아질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녀는 또 잔소리를 할 수 있고,
나는 또 참고 넘기려 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습관은 한 번의 대화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상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혼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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