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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심리/연애사연

바쁜 남자를 사랑하다가, 나는 나를 잊었다

by 다윗의장막 2026.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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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ey is not to prioritize what's on your schedule, but to schedule your priorities.”
“핵심은 일정표에 있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선순위를 일정표에 넣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 Stephen R. Co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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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가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약속을 잡을 때도 늘 캘린더를 먼저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번 주는 수요일 저녁 아니면 일요일 오후밖에 안 될 것 같아.”

 

성실해 보였다.

 

자기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

맡은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

쉽게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좋았다.

 

나는 누군가가 자기 삶을 제대로 꾸려가는 모습을 좋아했다.

말로만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조금 피곤해 보여도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이 믿음직했다.

 

연애학개론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퇴근 후에도 노트북을 열었고,

주말에도 회사 전화를 받았다.

가끔은 데이트 중에도 잠 깐 만이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미안. 이거 진짜 급한 거라.”

 

그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일인데 뭐.”

그때의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가 일을 대충 하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나를 보려고 애썼다.

밤 10시가 넘어서라도 우리 집 근처로 와서 30분쯤 산책을 했고,

점심시간에 잠깐 전화를 걸어 “밥 먹었어?” 하고 물었다.

그 짧은 전화 한 통에도 나는 하루가 조금 가벼워졌다.

그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오늘 회의가 너무 길었어.”

“힘들겠다.”

“응. 근데 너 목소리 들으니까 좀 낫다.”

 

그 말이면 됐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바쁘지만 틈을 내는 사람.

시간이 남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쪼개서 만나는 사람.

그래서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틈’이 점점 작아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번 오던 전화가 이틀에 한 번이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하지 않으면 오지 않았다.

메시지는 짧아졌다.

 

‘회의 중.’
‘나중에 전화할게.’
‘오늘 너무 정신없다.’
‘미안, 이제 봤어.’
‘퇴근 아직.’

 

나는 처음엔 이해했다.

일이 바쁘면 그럴 수 있다.

누구에게나 정신없는 시기가 있다.

나도 바쁜 날에는 답장을 늦게 할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쁜 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월요일은 주간 회의 때문에 바빴고,

화요일은 거래처 미팅 때문에 바빴고,

수요일은 갑자기 보고서가 생겨 바빴고,

목요일은 회식 때문에 바빴고,

금요일은 다음 주 준비 때문에 바빴다.

주말은 주중에 밀린 피로 때문에 쉬어야 했다.

 

연애학개론

 

그의 일상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운해도 서운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해?”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철없어 보일 것 같았다.

 

일하는 사람에게,

왜 나를 더 먼저 생각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성숙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그의 바쁨을 이해하고,

그의 피곤함을 알아주고,

그가 부담 갖지 않게 기다려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내 말은 점점 짧아졌다.

 

“오늘 볼 수 있어?”라고 묻고 싶어도,

“오늘도 바쁘지?”라고 보냈다.

 

“보고 싶어.”라고 말하고 싶어도,

“무리하지 마.”라고 했다.

 

“나 요즘 좀 외로워.”라고 말하고 싶어도,

“잘 챙겨 먹어.”라고 했다.

 

나는 내 마음을 말하지 않고,

그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려는 나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 조용함을 편안함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너는 진짜 이해심이 많아서 좋아.”

 

그가 어느 날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래?”

“응.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난리 났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칭찬처럼 들렸지만 마음 한쪽이 살짝 저렸다.

 

나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괜찮았던 걸까.

아니면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데 익숙해졌던 걸까.

그는 내가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괜찮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은 우리가 금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의 제대로 된 데이트였다.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며칠 전부터 뭘 입을지 생각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몰래 식당도 찾아봤고,

그가 좋아하는 조용한 분위기의 와인바도 저장해 뒀다.

금요일 오후 6시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 8시쯤 가능할 듯.’

 

나는 답했다.

 

‘괜찮아. 천천히 와.’

 

7시 40분.

 

‘미안. 8시 반.’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응. 기다릴게.’

 

8시 20분.

 

‘진짜 미안. 대표가 갑자기 불러서.

오늘 어려울 수도 있어.’

 

나는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봤다.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옆자리 커플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맞은편 테이블에서는 친구들이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휴대폰만 바라봤다.

답장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알겠어. 일 봐.’

 

전송하고 나서야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날 나는 혼자 집에 돌아왔다.

그는 밤 11시가 넘어 전화했다.

 

“진짜 미안해. 오늘 너무 정신없었어.”

“응. 괜찮아.”

 

나는 누워서 천장을 보며 말했다.

 

“화났어?”

“아니.”

“정말?”

“응. 일인데 어쩔 수 없지.”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고마워. 너 진짜 이해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은 그가 조금 더 아쉬워해주길 바랐다.

내가 혼자 기다린 시간을 떠올려주길 바랐다.

“많이 기다렸지?”라고 한 번 더 물어봐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내가 괜찮다고 하자 정말로 괜찮은 일로 만들었다.

 

그 뒤로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데이트가 미뤄지고,

통화가 줄고, 약속이 짧아졌다.

 

우리는 점점 연인이라기보다,

일정표 사이에 끼워 넣은 사람들처럼 만났다.

그는 늘 피곤했다.

 

“어? 미안. 다시 말해줄래?”

 

처음에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두 번째도 괜찮았다.

세 번째부터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줄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피곤한 사람 옆에서

오래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드는 건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내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내 업무를 떠넘기고 빠졌고,

팀장은 상황도 모르고 나만 재촉했다.

하루 종일 참고 있다가 퇴근길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한 시간 뒤 메시지가 왔다.

 

‘미안 회의 중이었어. 무슨 일 있어?’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아니야. 그냥 전화했어.’

 

그는 곧 답했다.

 

‘오늘 너무 바빠서 나중에 전화할게.’

 

그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말했다.

 

‘어제 깜빡 잠들었어. 미안.’

 

나는 휴대폰을 들고 한참 앉아 있었다.

깜빡.

그 단어가 마음에 남았다.

그는 나를 일부러 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의 하루에서 가장 먼저 미뤄지고,

가장 쉽게 잊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미웠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싫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두고 서운해하는 내가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도 힘들 텐데.

그도 버티고 있을 텐데.

내가 조금 더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마음은 설득된 척만 했다.

 

그러다 결정적인 날이 왔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원래 생일을 크게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보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선물을 많이 받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보내는 생일은 조금 기대했다.

 

그는 한 달 전부터 말했다.

 

“이번 생일엔 내가 꼭 제대로 챙길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너 바쁘잖아.”

“그래도 생일은 다르지.”

 

그 말이 좋았다.

생일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르다”라고 말해준 것이 좋았다.

 

수많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내 하루는 조금 다르게 기억해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생일 당일은 평일이었다.

그는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어디 갈지는 자기가 정하겠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다 준비할게. 넌 그냥 와.”

 

나는 괜히 설렜다.

퇴근 후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조금 일찍 와 있었다.

혹시 그가 늦을까 봐 카페에 들어가 기다렸다.

 

연애학개론

 

사실 불안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약속한 날이니까.

7시가 되었다.

연락이 없었다.

 

7시 10분.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쯤이야?’

 

답이 없었다.

 

7시 30분.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8시.

 

나는 카페에서 나와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이 퇴근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꽃집 앞에는 작은 꽃다발들이 놓여 있었고,

식당 앞에는 대기하는 커플들이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8시 20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바로 받지 못했다.

손이 떨렸다.

두 번째 벨이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당황한 듯했다.

 

“미안해. 나 진짜 미쳤나 봐.”

 

그 한마디에 나는 이미 알았다.

그는 잊었다.

 

“뭘?”

 

내가 물었다.

그는 잠깐 조용했다.

 

“오늘… 네 생일인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 오늘 회의가 갑자기 길어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캘린더 알림도 못 봤어.

지금 바로 갈게. 어디야?”

 

나는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간판 불빛이 켜지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전화를 하며 뛰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이상하게 혼자 멈춰 있는 사람 같았다.

 

“안 와도 돼.”

 

내가 말했다.

그가 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갈게. 진짜 바로 갈게. 30분이면 돼.”

“오지 마.”

“화난 거 알아. 내가 잘못했어. 근데 얼굴 보고 얘기하자.”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참아왔던 것들이 올라왔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실망, 서운함, 외로움, 부끄러움,

그리고 내가 또 이해해줘야 할 것 같은 피로감.

 

“너는 왜 항상 늦게 알아?”

 

내가 물었다.

그는 조용해졌다.

 

“내가 기다리고 나서야 알고,

내가 서운해하고 나서야 알고,

내가 말해야 알고,

내가 지친 다음에야 알아.”

 

“미안해.”

 

“나는 그 말도 너무 많이 들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싫어진 건 처음이야.”

 

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나 오늘 선물 기대한 거 아니야.

비싼 식당 기대한 것도 아니고,

이벤트 기대한 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오늘을 기억해줬으면 했어.”

 

길가의 바람이 차가웠다.

 

“네가 바쁜 거 알아. 진짜 알아.

그래서 나 많이 참았어.

보고 싶어도 말 줄였고,

약속 미뤄져도 괜찮다고 했어. 네가 힘들까 봐.”

 

말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알게 됐다.

 

“근데 나는 누가 이해해 줘?”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 질문에 그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너무 미안해... 오늘은 진짜 내가 잘못했어.”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야.”

“알아. 내가 바빠서 네 마음을 못 챙긴 거 알아.”

“아니. 너는 아직도 바빠서 그런 거라고 말하잖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는 너무 환했고, 나는 울 곳이 없었다.

 

“바쁘면 사람을 잊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그는 침묵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네 시간 속에 내가 없는 거잖아.”

 

그 말이 나오자, 나도 놀랐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자꾸 놓쳤다.

일정 속에서, 피로 속에서, 급한 일들 속에서.

나는 항상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항상 이해받는 사람이었다.

그 균형이 너무 오래 무너져 있었다.

 

“우리 오늘 만나서 얘기하자.”

 

그가 말했다.

 

“지금 내가 갈게.”

“아니.”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너 생일인데.”

 

그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그러게. 내 생일인데.”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내가 내 생일에 또 너 기다리면서 울고 싶지는 않아.”

 

그는 더 이상 붙잡지 못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그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몇 번 더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왔다.

 

‘정말 미안해.’
‘내가 오늘 너무 큰 실수 했어.’
‘제발 한 번만 얼굴 보고 얘기하자.’
‘집 앞에서 기다릴게.’

 

나는 화면을 껐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작은 케이크 하나를 샀다.

 

편의점 냉장고에 있던 조각 케이크였다.

생일 케이크라고 하기엔 초라했지만,

그날의 내 마음과는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지 않고 식탁 앞에 앉았다.

케이크 뚜껑을 열고, 작은 플라스틱 포크를 꺼냈다.

축하 노래도 없었다. 휴대폰은 계속 울리다 멈췄다.

 

나는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달았다.

너무 달아서 목이 메었다.

그때서야 눈물이 났다.

 

나는 그가 싫어서 우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해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아직도 알아서 더 슬펐다.

사랑하는데도 놓치는 사람이 있다.

나쁜 마음이 없어도 상처 주는 사람이 있다.

미안해하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나를 기다리게 만든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나를 얼마나 오래 미뤄두었을까.

다음 날 아침, 그는 집 앞에 와 있었다.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는데,

현관 앞 벽에 기대 서 있는 그를 봤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잔 얼굴이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과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얼굴만 봐도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

나는 문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미안해.”

 

나는 가만히 그를 봤다.

 

“밤새 생각했어.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네가 늘 이해해 주니까, 나도 모르게 계속 기대기만 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꽃다발을 내밀지 못하고 손에 쥔 채 말했다.

 

“생일을 잊은 건 정말 변명할 수 없는 일이야. 근데 그것보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가 몰랐던 게 더 미안해.”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가 드디어 오늘의 실수만이 아니라

그동안의 시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쁘기보다 더 아팠다.

왜 사람은 꼭 누군가 무너지고 나서야 보게 될까.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나 출근해야 해.”

“잠깐만.”

 

그가 급하게 말했다.

 

“우리 다시 얘기하면 안 돼?”

“얘기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그는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기회 안 줄 거야?”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기회.

 

그 단어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다.

그가 늦었을 때, 약속을 미뤘을 때, 전화를 잊었을 때,

내가 괜찮다고 말하며 넘긴 모든 순간이 사실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기회라고 느끼지 못했다.

내가 조용했기 때문이다.

 

“나도 잘못했어.”

 

내가 말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계속 괜찮다고만 했어.

네가 알아서 알아주길 바랐고,

내가 힘들다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어.”

 

“아니야. 내가 못 챙긴 거야.”

 

“그것도 맞아.”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근데 나도 이제는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해야 할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네 삶에서 빈 시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한테 일이 중요한 거 알아.

네가 책임감 있는 사람인 것도 알아.

그 점을 좋아했어.

하지만 연애가 늘 네 일이 끝난 다음,

네 피곤함이 남긴 자리,

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나는 계속 외로울 것 같아.”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바꿀게.”

“그 말도 믿고 싶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지금은 바로 믿을 힘이 없어.”

 

그는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돼?”

 

나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헤어지고 싶은지, 시간을 갖고 싶은지,

다시 시작하고 싶은지 나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어제의 일은 단순히 생일을 잊은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미뤄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드러난 날이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쉽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져 있자.”

 

내가 말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얼마나?”

“모르겠어.”

“기다리면 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 대답 없음 속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았다. 예뻤다.

아마 어제 준비했어야 했을 꽃이었고,

오늘에서야 도착한 마음이었다.

늦은 마음은 마음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늦은 마음은 때때로 이미 비어버린 자리에 도착한다.

 

“출근할게.”

 

내가 말했다.

그는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뒤에서 그가 작게 말했다.

 

“생일 축하했어야 했는데.”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얼굴이 보였다.

후회와 피로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사랑했다.

그래서 더 오래 아팠다.

회사로 가는 길,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리고 늦어서 미안해. 생일도, 네 마음도.’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답장을 쓰지 못했다.

 

사랑에도 출근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지각했을까.

 

그는 일에 늦지 않으려고 늘 뛰었지만,

내 마음에는 자주 늦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이해하느라,

내 마음에 너무 오래 늦었다.

그날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그의 바쁨을

내 외로움보다 먼저 변명해주지 않기로 했다.

바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쁜 사람의 삶에서 계속 잊히는 사람으로 남을 수는 없다.

사랑은 매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은 있어야 한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없는 사람보다 더 아픈 사람은,

마음의 우선순위에서 자꾸 밀려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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