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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심리/연애사연

그는 나를 웃기려 했고, 나는 울 곳을 잃었다

by 다윗의장막 2026.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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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joy is your sorrow unmasked.”
“당신의 기쁨은 드러난 슬픔입니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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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의 장난이 좋았다.

그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도 그가 한마디만 하면 조금 풀렸고,

어색한 자리에서도 그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말 한마디를 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하는 편이었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괜히 컵만 만지작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옆에서 그는 늘 가볍게 웃었다.

 

연애학개론

 

그가 처음 내게 했던 말도 그랬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였다.

소개팅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친 뒤

따로 커피를 마시게 된 날이었다.

나는 메뉴판 앞에서 오래 고민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괜히 단 걸 시키면 너무 어린애 같아 보일지

이상한 생각까지 하던 중이었다.

 

그가 옆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얼굴인데요?”

 

나는 당황해서 웃었다.

 

“아니, 그냥 뭐 마실지 고민 중이었어요.”

 

“그럼 제가 정해드릴게요. 오늘 표정은 따뜻한 라테 쪽입니다.”

 

“표정에도 메뉴가 있어요?”

 

“있죠. 지금 아메리카노 마시면 큰일 날 것 같은 표정이에요.”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그는 그런 식이었다.

대단히 깊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말을 잘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실수도 장난처럼 넘겨줬다.

커피를 쏟았을 때도 그는 말했다.

 

“괜찮아요. 직원분이 커피를 좀 많이 주긴 했어요.”

 

길을 잘못 들어 10분을 돌아갔을 때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인생도 원래 네비가 가끔 이상한 데로 데려가잖아요.

그리고 서울 바닥은 아무 데로나 가도 도착해요.”

 

나는 그런 여유가 좋았다.

나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늘 계획하고,

확인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약속 시간을 지키려면 20분쯤 먼저 도착했고,

누군가의 말투가 달라지면 하루 종일 그 이유를 생각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느렸다.

마음을 주기 전에 이 사람이 안전한 사람인지 오래 살폈다.

 

그는 반대였다.

가볍고, 빠르고, 밝았다.

내 걱정을 웃음으로 덮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있으면 나도 조금 덜 무거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너랑 있으면 내가 너무 재미없는 사람 아닌가 싶어.”

 

그는 빨대를 입에 문 채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너는 재미없는 게 아니라, 고급스러워.”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분식집 떡볶이고,

너는 예약해야 먹을 수 있는 코스 요리.”

 

“비유가 이상해.”

 

“그래도 맛있다는 뜻이야.”

 

나는 웃었다.

그는 내 웃음을 보는 걸 좋아했다.

 

“봐. 웃으니까 훨씬 낫잖아.”

 

그 말이 좋았다.

누군가 내 웃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좋았다.

내가 진지해질 때마다 그가 가볍게 손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삶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세상이 그렇게 무서운 곳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사귀게 된 것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였다.

봄비가 조금 내리던 날,

우리는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왔다.

그는 우산을 펴다 말고 손잡이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잠깐만. 영화처럼 해볼게.”

 

그러더니 멀리 뛰어갔다가,

다시 달려와 우산으로 우리 두 사람을 가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하지 마. 사람들 봐.”

 

“보라고 하는 건데?”

 

“창피해.”

 

“내가 창피해?”

 

그가 장난스레 서운한 얼굴을 했다.

나는 웃다가 대답했다.

 

“조금.”

 

그는 그 말에도 웃었다.

 

“그럼 창피하지만 괜찮은 남자친구 할게.”

 

“누가 남자친구래?”

 

“아, 아직 아니야?”

 

그는 우산을 들고 멈춰 섰다.

 

“그럼 지금 고백해도 돼?”

 

나는 그 순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웃었고, 그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비는 조금씩 내렸고,

길가의 가로등은 노랗게 번져 있었다.

그날의 나는 그가 가진 가벼움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가볍다는 것은 때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정말 사소했다.

그는 약속 시간에 자주 늦었다.

5분, 10분, 20분. 늦는 이유도 매번 비슷했다.

 

“미안, 알람이 나를 배신했어.”

“버스가 나를 싫어하나 봐.”

“내가 늦은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빨리 간 거야.”

 

그는 늘 웃으며 나타났다.

나는 처음에는 같이 웃었다.

 

“이번엔 또 시간이 잘못했어?”

“응. 시간 고소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 화가 풀렸다.

아니,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가볍게 했고,

나는 그의 장난 뒤에 숨은 미안함을 알아서 읽어주려 했다.

그런데 반복되면 장난도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어느 토요일, 우리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였고,

그는 예매를 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관 앞에서 만난 그는 손에 팝콘만 들고 있었다.

 

“예매했지?”

 

내가 물었다.

그는 잠깐 멈추더니 웃었다.

 

“아.”

“아?”

“진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네.”

“설마 안 했어?”

“내 머릿속에서는 했어.”

 

나는 그 순간 웃지 못했다.

 

“그럼 표 없어?”

“현장 예매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매표소 쪽을 봤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보려던 시간은 매진이었다.

다음 회차는 두 시간 뒤였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팝콘 통을 내밀었다.

 

“대신 팝콘은 대형이야.”

“나 이 영화 보고 싶다고 일주일 전부터 말했잖아.”

“알아. 미안. 근데 두 시간 뒤 거 보면 되잖아.”

“나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해서 오늘 늦게 못 들어간다고 했어.”

“그럼 다음에 보면 되지.”

 

그는 너무 쉽게 말했다.

다음에 보면 되지.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영화를 꼭 오늘 봐야 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내가 기대한 일을 그가 가볍게 넘겼다는 게 서운했다.

 

내가 며칠 동안 이야기했던 걸

그가 정말로 중요하게 듣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조용해지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팝콘을 하나 입에 넣고 말했다.

 

“이거라도 영화처럼 먹자. 자, 슬로모션.”

 

그는 팝콘을 공중으로 던져 받아먹으려 했다.

팝콘은 그의 입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졌다.

예전 같으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바닥에 떨어진 팝콘보다 내 마음이 더 초라했다.

 

연애학개론

 

 

“그만해.”

 

내가 말했다.

그가 멈칫했다.

 

“왜 그래. 웃기려고 한 건데.”

“지금은 안 웃겨.”

 

그는 잠깐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어색하게 웃었다.

 

“아, 진짜 화났네.”

 

그 말투는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그는 내가 화난 이유보다

내가 화났다는 사실 자체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장난으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더 이상 웃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비슷한 일이 조금씩 쌓였다.

내가 진지하게 회사 이야기를 하면 그는 중간에 농담을 했다.

 

“팀장이 또 그랬어?”

“응. 진짜 이번엔 너무했어. 내가 준비한 자료를—”

“혹시 팀장님 전생에 네 원수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대신 복수해 줄까?”

 

나는 처음엔 웃었다.

하지만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랐다.

웃겨주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바랐다.

 

하루는 내가 정말 힘든 날이었다.

회사에서 실수 아닌 실수로 질책을 받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까지 연착됐다.

몸도 마음도 다 지친 상태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는 바로 말했다.

 

“그럼 오늘의 힘듦을 점수로 매기면 몇 점?”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런 거 말고…”

“아, 그러면 힘듦 월드컵 해볼까? 회사 스트레스 대 지하철 연착.”

“나 장난할 기분 아니야.”

 

그제야 그는 조용해졌다.

 

“아… 미안.”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돼?”

“듣고 있잖아.”

“아니. 너는 자꾸 웃기려고 하잖아.”

 

전화기 너머로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네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는 정말로 나를 웃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울고 싶을 때도 웃어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웃음이 위로가 아니라 회피처럼 느껴진다.

그는 진지한 감정을 오래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서운하다고 말하면 그는 장난으로 피했다.

 

“너 또 삐졌지?”

“삐진 게 아니라 서운한 거야.”

“삐짐과 서운함의 차이를 2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무서워.”

 

그는 두 손을 들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더 말하기 싫어졌다.

내가 너무 심각한 사람인가.

그런 생각도 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인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그는 밝고 장난스러운 사람이고,

나는 그 점이 좋아서 만난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진지해지라고 요구하는 건 그를 바꾸려는 걸까.

나는 자주 나 자신을 의심했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의 장점을 좋아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 장점이 어느 순간 나를 다치게 할 때,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말을 들으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가끔은 네가 내 말을 너무 가볍게 넘기는 것 같아.”

 

그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래 몸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농담하지 말고.”

“알았어. 근데 나 진짜 네 말 가볍게 생각 안 해.”

“근데 왜 항상 장난으로 받아?”

“그게 내 방식이야.”

“네 방식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어.”

 

그는 그 말에 조금 굳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매번 진지하게 앉아서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이런 말만 해야 돼?”

 

“그렇게만 하라는 게 아니야.”

 

“근데 너는 내가 조금만 장난쳐도 싫어하잖아.”

 

“조금이 아니잖아.”

 

그는 말이 없어졌다.

그 침묵은 이상하게 차가웠다.

평소에 늘 장난으로 말을 채우던 사람이 조용해지자,

나는 오히려 더 불안했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나는 너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너는 내가 다 틀린 것처럼 말하네.”

 

그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그를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웃게 해 준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매번 웃음으로만 지나가면,

내 슬픔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뜻 아니야.”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무슨 뜻인데?”

“나는 네가 가끔 내 기분을 그냥 인정해 줬으면 좋겠어.”

“인정 안 한 적 없어.”

“장난으로 넘기는 게 인정은 아니잖아.”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자주 어긋났다.

 

그는 여전히 밝았다.

여전히 나를 웃기려 했고,

여전히 상황을 가볍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웃는 일이 줄었다.

웃음이 나오다가도 멈췄다.

이 웃음 뒤에 또 내 감정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 앞에서였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도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놀리는 것도 그의 방식이었다.

 

“얘는 진짜 뭐든 계획하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친구들이 웃었다.

 

“여행 가면 분 단위로 움직이려고 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나 그는 더 신이 난 듯 말했다.

 

“아니야. 너 진짜 대단해.

우리 지난번에 카페 가는 데도 후보지를 세 개나 뽑아왔잖아.”

“그건 사람이 많을까 봐…”

“봐. 지금도 설명하려고 해.”

 

사람들은 또 웃었다.

나는 그때 따라 웃지 못했다.

 

내가 계획을 세우는 건

그가 늘 즉흥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예약을 잊고, 시간을 착각하고,

지갑을 두고 나오고, 갑자기 다른 곳에 가자고 했다.

나는 우리가 덜 헤매고 덜 당황하려고 미리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나는 재미없는 사람,

융통성 없는 사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말했다.

 

“아까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

 

“뭐?”

“나 계획표 없으면 못 산다고 한 거.”

“그냥 웃자고 한 말이잖아.”

“나는 별로 안 웃겼어.”

“너도 참…”

 

그는 말을 흐렸다.

 

“뭐?”

“아니야.”

“말해.”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 너랑 있으면 말조심을 너무 해야 돼.

장난 하나도 그냥 못 받아들이고.”

 

나는 창밖을 보았다.

그 말은 아팠다.

나는 그에게 말조심만 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진 장난스러움 자체를 없애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성향을 가볍게 조롱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장난이었다.

나에게는 상처였고.

그 차이가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특별한 사건은 여름 끝자락에 일어났다.

그날은 내 아버지의 수술이 있던 날이었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가족들 모두 긴장했다.

나는 병원에 하루 종일 있었고,

아버지가 회복실로 옮겨진 뒤에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 병원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너 밥도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내가 뭐 사갈게.”

 

그 말이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나는 병원 로비에서 그를 기다렸다.

몸이 피곤했고, 머리는 아팠다.

어머니는 병실에 계셨고,

나는 잠깐 내려와 있었다.

그날만큼은 그의 장난도 반가울 것 같았다.

그가 오면 조금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약속 시간보다 40분 늦었다.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나는 로비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계속 확인했다.

메시지는 한참 뒤에야 왔다.

 

‘미안ㅋㅋ 길 잘못 들었어. 병원이 미로네.’

 

그 문장 끝의 웃음 표시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금 뒤 그가 나타났다. 한 손에는 김밥 봉투를 들고 있었다.

 

“와, 여기 진짜 찾기 어렵다.

병원 설계한 사람 잡아야 돼.”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내 앞에 서서 봉투를 흔들었다.

 

“배고프지? 내가 김밥이랑 떡볶이 사 왔어.

병원 앞 분식집 맛집이더라.”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왜 늦었어?”

“말했잖아. 길 잘못 들었다고.”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배터리 없어서. 그리고 정신없었어.

나도 병원 주차장 찾느라 고생했다니까.”

 

그는 내 옆에 앉으며 봉투를 열었다.

 

“일단 먹자. 사람이 배고프면 더 우울해져.”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가 내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왜 그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장난치지 말아 줘.”

 

그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나 장난 안 쳤는데?”

“방금도 했잖아. 병원 설계한 사람 잡아야 된다고.”

“그건 그냥 하는 말이지.”

“오늘은 그냥 하는 말도 힘들어.”

 

그는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괜찮으셔?”

 

그 질문이 너무 늦게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아팠다.

 

“응. 수술은 잘 끝났어.”

“다행이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밥 먹자. 너 얼굴 완전 좀비야.”

 

나는 눈을 감았다.

좀비.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하루 종일 긴장했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겨우 참았고,

병원 냄새와 흰 조명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에게만큼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또 나를 웃기려 했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가볍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힘들었겠지.”

 

나는 그 말에 조금 숨을 쉬려 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덧붙였다.

 

“그래도 수술 잘 끝났으니까 이제 웃어야지.

너무 처져 있으면 아버지도 더 걱정하실 거야.”

 

나는 그 순간 멍해졌다.

이제 웃어야지.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내 감정을 너무 빨리 정리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오늘 하루 종일 참고,

겨우 그에게 힘들었다고 말했는데,

그는 나에게 이제 웃으라고 했다.

나는 천천히 물었다.

 

“나는 언제까지 웃어야 돼?”

 

그가 당황했다.

 

“무슨 말이야?”

“너랑 있으면 나는 힘들어도 웃어야 하는 사람 같아.”

“그게 아니라…”

“네가 분위기 풀어주려고 하는 거 알아.

근데 나는 오늘 그냥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어.

무서웠다고. 하루 종일 버티느라 너무 지쳤다고.

그 말만 하고 싶었어.”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근데 너는 또 웃기려고 하고,

또 괜찮아졌다고 말하고,

또 내가 너무 처져 있으면 안 된다고 해.”

 

“나는 네가 더 힘들까 봐…”

“그럼 그냥 안아주면 됐잖아.”

 

그 말이 나오자 눈물이 고였다.

 

“그냥 괜찮냐고 물어봐 주면 됐잖아.

밥 먹자고 하기 전에, 농담하기 전에,

내 얼굴을 좀 봐주면 됐잖아.”

 

그는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비에는 사람들이 오갔다.

보호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통화했고,

간호사가 서류를 들고 지나갔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밤공기가 조금씩 들어왔다.

그는 한참 뒤에 말했다.

 

연애학개론

 

“나는 그런 걸 잘 못해.”

 

그 말은 솔직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알아.”

 

내가 말했다.

 

“네가 못한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많이 이해하려고 했어.”

“그런데?”

“근데 나도 더는 힘들어.”

 

그는 나를 바라봤다.

 

“너 나한테 실망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망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나는 지쳤다.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울고 싶을 때마다 그가 나를 웃기려 했기 때문에.

내가 진지하게 말하려 할 때마다

그가 장난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내 감정이 매번 그의 농담 앞에서 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나는 네가 싫어진 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근데 네 옆에 있으면 내 감정을 끝까지 느낄 수가 없어.”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나는 눈물을 닦았다.

 

“응.”

 

그가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그 손이 허공에서 잠깐 머뭇거리는 걸 봤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먼저 잡았을 것이다.

그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해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날은 잡지 않았다.

그도 끝내 내 손을 잡지 못했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장난이 없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진지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바로 풀리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린 말은,

마침내 도착해도 제때 도착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미안해.”

 

내가 말했다.

 

“내가 너무 오래 괜찮은 척했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 어떻게 해야 돼?”

 

나는 로비 바닥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바닥 위로 흰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멀리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혔다.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

 

그가 숨을 들이켰다.

 

“시간 갖자는 거야?”

“응.”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지?”

 

나는 대답이 늦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아직은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웃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는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이 낯설어서 더 아팠다.

그날 우리는 병원 로비에서 헤어졌다.

 

그가 사 온 김밥 봉투는 의자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그에게 건넸다.

 

“가져가.”

 

그가 작게 말했다.

 

“너 먹어.”

“지금은 못 먹겠어.”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한 번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는 김밥 봉투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내가 알던 장난기 대신 막막함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나를 웃게 해 준 많은 날들을 잊을 수 없었다.

내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준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의 장난이 전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장난 덕분에 버틴 날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는 웃음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날은 침묵이 필요하고,

어떤 날은 눈물이 필요하고,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나를 웃게 하는 법은 알았지만,

내가 울 수 있게 곁에 있어주는 법은 아직 몰랐다.

집으로 돌아온 밤,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진짜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계속 웃기려고만 했던 것 같아.’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답장을 바로 하지 못했다.

잠시 뒤 하나가 더 왔다.

 

‘너를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

내가 무거운 감정을 잘 못 견뎠던 것 같아.’

 

그 문장을 읽고 눈물이 났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장난 뒤에 숨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우리를 바로 되돌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뒤에 답했다.

 

‘알아. 그래서 더 오래 참았어.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은 조용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

병원 로비, 흰 조명, 그의 손에 들린 김밥 봉투,

끝내 내 손을 잡지 못하던 그의 손.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감정을 받아내는 방식이 너무 달랐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웃음으로 사랑했고,

나는 진심으로 머물러주길 바랐다.

그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면 내가 덜 아플 거라 믿었고,

나는 내 아픔이 충분히 무겁게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그 차이가 처음에는 우리를 끌어당겼고,

나중에는 우리를 지치게 했다.

며칠 동안 우리는 연락을 줄였다.

그는 가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괜찮으셔?’

‘오늘 밥은 먹었어?’

 

예전 같으면 그 뒤에 농담이 붙었을 것이다.

“밥 안 먹으면 내가 김밥 들고 출동한다” 같은 말.

그런데 이번에는 없었다.

그의 문장은 조금 어색했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어색함이 싫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하던 방식 밖으로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도 쉽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 번 지친 마음은 사과 몇 마디로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원하는 위로를 말하지 않고,

그가 알아주길 바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어느 저녁, 나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네 장난이 싫었던 건 아니야.

다만 내 감정이 장난 속에서 자꾸 사라지는 게 힘들었어.’

 

그는 한참 뒤에 답했다.

 

‘이제 알 것 같아. 늦었지만.’

 

나는 그 문장을 보며 창밖을 바라봤다.

늦었지만.

사랑에는 자주 그런 말이 붙는다.

늦었지만 알게 되는 것들.
늦었지만 미안해지는 것들.
늦었지만 멈춰 서는 것들.

 

우리가 다시 만날지,

이대로 멀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도 좋지만,

내가 울 때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늘 밝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어두운 마음 옆에 조용히 앉아주는 일이라는 것.

 

그가 내게 주었던 웃음은 진짜였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사랑은

웃음 뒤에 숨은 침묵까지 함께 견뎌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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