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아직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인데 왜 헤어지고 싶냐고.
그런데 사랑은 꼭 누군가가 나쁜 사람이 되어야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힘든 건 서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마음이 끝나버리는 경우였다.
그와 나는 4년을 만났다.
누군가는 짧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스물여섯에 만나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는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났고.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화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많이 사랑했다.
그의 웃음이 좋았고.
그의 목소리가 좋았고.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좋았다.
그래서 미래도 자연스럽게 상상했다.
결혼.
아이.
함께 늙어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감정이 찾아왔다.
아니.
감정이 찾아온 게 아니라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피곤한 줄 알았다.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 줄 알았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연락이 와도 예전처럼 반갑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이 와도 설레지 않았다.
주말 약속이 잡혀도 기다려지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상했다.
어느 금요일 저녁.
그가 말했다.
"내일 뭐 먹고 싶어?"
예전 같았으면 이것저것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거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대답."

나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예전과 달랐다.
문제는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생일도 챙겨주고.
아플 때 약도 사다 주고.
퇴근길에 데리러 오기도 했다.
친구들이 들으면 부러워할 정도로 좋은 남자였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만약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쉬웠을 것이다.
거짓말을 했다면.
바람을 피웠다면.
나를 무시했다면.
나는 화를 내고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있는데도 외롭다는 것을.
그는 내 옆에 있었다.
손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 생각했다.
'혹시 사랑이 끝난 걸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눈물이 났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무서워서였다.
사랑이 끝난다는 게 이렇게 조용한 일인지 몰랐다.
영화처럼 큰 싸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라마처럼 배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부터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데이트도 먼저 제안했다.
선물도 준비했다.
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이상한 공허함뿐이었다.
그와 여행을 갔던 날이 기억난다.
바다는 아름다웠다.
날씨도 좋았다.
그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계속 생각했다.
'왜 아무 감정이 없지?'
그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순간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직도.
분명히.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그는 미래 이야기를 했다.
결혼 이야기를 했다.
신혼집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미래에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몰랐다.
내가 그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내 손을 잡을 때마다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그는 말했다.
"우리 진짜 오래 만났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더 좋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나는 반대였다.
오래 만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오래 만나서 헤어지기 어려워진 상태였다.
그때부터 나는 헤어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상처받는 모습이 무서웠다.
그가 울면 어떡하지.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왜 헤어지고 싶어?"
그 질문에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사랑이 끝난 것 같아."
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런데 정말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면 떠나기 쉽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떠나는 것은 너무 어렵다.
나는 매일 고민했다.
오늘 말할까.
내일 말할까.
다음 주에 말할까.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용기가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들킨 줄 알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있으면 말해."
그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가 나를 사랑해서.
그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아서.
나는 오늘도 헤어지자는 말을 삼켰다.
사람들은 사랑이 끝나면 쉽게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
추억.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상대가 받을 상처.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곁에 있다.
하지만 가장 슬픈 사실은 이것이다.
나는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는 아직도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나 혼자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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