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ccessful marriage requires falling in love many times, always with the same person.”
“성공적인 결혼은 같은 사람과
여러 번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일을 필요로 한다.”
— 미뇽 맥러플린 Mignon McLaughlin
결혼 5년 차가 되면 모든 게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다.
처음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연애할 때처럼
매번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되고,
헤어질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괜히 휴대폰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는 관계.
한집에 산다는 건 사랑이 조금 더
안정적인 모양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문을 열면 그녀가 있고
주말 아침에는 같은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고,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하루가 자연스럽게 함께 흘러가는 것.
그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정말 그랬다.
신혼 초의 우리는 별것 아닌 일에도 자주 웃었다.
작은 전기밥솥 하나를 고르는데도
마트에서 30분을 서 있었고,
접시 색깔을 두고도 오래 고민했다.
그녀는 베이지색을 좋아했고,
나는 무난한 흰색이면 된다고 했다.
“흰색은 너무 단순하지 않아?.”
“접시가 화려하면 좋아?”
“당연하지. 밥 먹을 때 기분이 달라진다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결국 우리는 베이지색 접시 세트와
흰색 국그릇을 함께 샀다.
집에 와서 식탁에 올려놓고 나니,
정말 이상하게도
집이 조금 더 우리 집 같아 보였다.
그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전부 특별했다.
처음 산 커튼, 처음 놓은 식탁,
처음 함께 끓인 된장찌개, 처음 맞이한 겨울.
그녀는 퇴근길에 꽃을 사 오기도 했고,
나는 주말마다 서툰 솜씨로 계란말이를 했다.
모양은 늘 이상했다.
옆구리가 터지고, 색은 조금 탔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건 계란말이가 아니라 계란 접기 같은데?”
“그래도 맛은 있잖아.”
“맞아! 노력이 맛으로 느껴져.”
나는 그 말에 웃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했다.
다정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다정함이 자연스러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고,
그녀가 잠들기 전 뒤척이면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묻지 않게 됐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특별한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멀어진 데에는 누군가의 배신도,
큰 싸움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없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사람은 큰일이 있어야 멀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어서 멀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였다.
나는 회사 일이 바빠졌다.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집에 들어오면
이미 밤 10시가 넘는 날이 많았다.
현관문을 열면 거실 불은 켜져 있었고,
그녀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거나
식탁 앞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왔어?”
그녀가 물었다.
“응.”
“밥은?”
“회사에서 먹었어.”
“알겠어.”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휴대폰을 봤다.
화면 속에는 내가 오늘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와 뉴스와 쇼핑 광고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옆에서 리모컨을 눌렀고,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렸다.
한집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각자의 화면 속에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부가 매일 진지한 대화를 할 수는 없으니까.
같이 산다고 해서 매 순간 애틋할 수는 없으니까.
피곤한 날에는 말없이 쉬는 것도 필요하니까.
그런데 말없는 날들이 늘어났다.
저녁 식탁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함께 먹으려 애썼다.
퇴근이 조금 늦어도 그녀는 나를 기다렸다.
나는 미안해서 “먼저 먹지 그랬어”라고 했고,
그녀는 “같이 먹으려고”라고 했다.
그 말이 당연해진 뒤부터 나는 더 자주 늦었다.
어느 날은 밤 9시 반에 집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는 찌개와 반찬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 먹었어?”
내가 물었다.
“먹었어.”
“같이 먹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녀는 잠깐 나를 봤다.
“배고파서 먼저 먹었어.”
“잘했네. 기다리지 말라니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느라
배고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는 이상한 무심함도 섞여 있었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배려였지만,
내가 늦는 일을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했다.
늦게 들어와도 부담이 줄었다.
그녀가 먼저 먹고 쉬고 있으면,
나도 편하게 식은 밥을 데워 먹으면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식탁은
우리를 이어주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장소가 됐다.
냉장고에는 반찬이 있었고,
밥솥에는 밥이 있었다.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그런데 같이 앉아 먹는 시간은 줄었다.
그녀는 점점 내 퇴근 시간을 묻지 않았다.
나는 점점 그녀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싸웠다면 더 빨리 알았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우리는 싸울 기운도 없었다.
각자 피곤했고, 각자 바빴고,
각자 괜찮은 척했다.
주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이면 나는 늦게까지 잤다.
평일에 못 잔 잠을 몰아서 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면 정오가 가까웠고,
거실에서는 청소기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미 세탁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분리수거할 것들을 현관 앞에 모아두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어?”
그녀가 말했다.
“응. 몇 시야?”
“열두 시 다 됐어.”
“많이 잤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물을 마셨다.
그녀는 청소기를 끄고 나를 봤다.
“오늘 뭐 할 거야?”
“글쎄. 좀 쉬어야지.”
“또 쉬어?”
그 말에 나는 살짝 짜증이 났다.
“평일 내내 일했잖아.”
“나도 일했어.”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맞았다. 그녀도 일했다.
그녀도 피곤했다.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내가 더 힘든 일을 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내 피로는 내가 직접 느끼니까
더 크게 느껴졌고 그녀의 피로는
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점점 말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녀는 작은 것도 잘 말했다.
회사에서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점심에 먹은 음식이 별로였는지,
지하철에서 본 아이가 귀여웠는지,
길가에 새로 생긴 빵집이 궁금한지.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좋았다.
그녀의 하루를 조금씩 나눠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결혼 5년 차가 되자
그녀의 하루는 짧아졌다.
“오늘 어땠어?”
내가 가끔 묻는 날이 있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그냥.”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나도 피곤했고,
그녀도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은 더 묻는 법을 잊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그냥이라는 말 뒤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의 “그냥”은 아무 일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설명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결혼 5주년이 가까워질 무렵에도
우리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처음 1주년 때는 작은 호텔을 예약했다.
2주년에는 바닷가에 다녀왔다.
3주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식당에 갔다.
4주년에는 내가 야근을 했고,
늦은 밤 케이크 하나를 사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웃으며 촛불을 켜줬지만,
그 웃음이 조금 쓸쓸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기억한다.
5주년은 그냥 넘어갈 뻔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거의 잊고 있었다.
며칠 전 그녀가 식탁 달력 앞에서 말했다.
“다음 주 금요일이네.”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물었다.
“뭐가?”
그녀는 잠시 나를 봤다.
“우리 결혼기념일.”
나는 그제야 아, 하고 말했다.
“벌써 그렇게 됐네.”
“응.”
“뭐 먹으러 갈까?”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녀는 달력을 보다가 대답했다.
“됐어. 금요일엔 사람 많을 텐데.”
“그럼 토요일?”
“그냥 집에서 먹어도 되고.”
나는 그녀가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내가 뭐 사 올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화는 아주 평범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서 그녀는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등을 돌리고 잠들었을까.
예전에는 잠들기 전 꼭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이 찬 편이었고,
나는 그 손을 내 손안에 넣고 데워주곤 했다.
겨울이면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조금 붙이며 누웠다.
“손난로 같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그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옆에 누운 그녀의 손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불속에 손을 넣고 있었고,
나는 괜히 어색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을 잡는 일이 이렇게 어려워질 수도 있구나.
그날 나는 처음으로 조금 무서웠다.
우리가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아주 천천히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결혼기념일 당일, 나는 퇴근길에 케이크를 샀다.
사실 회사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오후 내내 회의가 있었고,
퇴근 직전에는 예상치 못한 보고서 수정이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늦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팀장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조금 긴장했다.
그런데 팀장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일 봅시다.”
나는 허탈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회사 핑계로 미뤄왔던 건지도 몰랐다.
정말 어쩔 수 없던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내가 일에 붙잡힌 게 아니라,
일 뒤에 숨어버린 날들도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 불은 켜져 있었다.
나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어갔다.
“나 왔어.”
거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그녀는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대단한 음식은 아니었다.
된장찌개, 계란말이, 나물 몇 가지,
그리고 조기구이.
그런데 나는 그 식탁을 보고 잠깐 멈췄다.
우리가 신혼 때 자주 먹던 메뉴였다.
특히 계란말이.
모양이 예쁘게 말려 있었다.
내가 만들던 옆구리 터진 계란말이와 달랐다.
“이거…”
내가 말했다.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냥. 냉장고에 재료가 있어서.”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나는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놓았다.
“나도 케이크 사 왔어.”
“응.”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음식은 따뜻했다.
그런데 대화는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젓가락이 접시에 닿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란말이 맛있다.”
“다행이네.”
“예전에는 내가 자주 했는데.”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접기처럼 하던 거?”
“그걸 아직 기억해?”
“기억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물을 마셨다.
나는 그 순간 마음이 조금 아팠다.
우리는 잊은 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다정했던 순간들을
완전히 잊은 게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래 꺼내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내가 케이크를 꺼냈다.
작은 초도 함께 샀다. 숫자 5 모양의 초였다.
케이크 위에 꽂고 불을 붙였다.
불빛이 작게 흔들렸다.
“5년 됐다.”
내가 말했다.
그녀는 초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러게.”
“빠르다.”
“응.”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초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미리 준비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미안해.”
그녀가 나를 봤다.
“뭐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뭐가 미안한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늦게 들어온 것,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것,
주말마다 혼자 쉬겠다고 한 것,
그녀의 피곤함을 모른 것,
식탁 앞에서 휴대폰만 본 것,
침대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
그중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좀… 내가 많이 무심했던 것 같아.”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갑자기?”
그 말이 날카롭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친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
“갑자기라기보다…”
나는 말을 고르다가 멈췄다.
“아니, 네 입장에선 갑자기일 수 있겠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요즘 우리 너무 말이 없잖아.”
“당신도 느꼈어?”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가슴이 덜컥했다.
당신도 느꼈어?
그 말은
그녀가 훨씬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응. 늦게 느낀 것 같아.”
그녀는 초를 바라봤다.
촛불이 작게 흔들렸다.
“나는 한참 됐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언제부터?”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당신이 집에 와서 밥 먹었냐고 묻기보다
회사 이야기부터 하던 때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오늘 힘들었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휴대폰만 보던 날부터. 정확히는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하나하나가 마음에 박혔다.
“나도 말 안 한 거 알아.
근데 어느 순간부터
말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았어.”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해.”
나는 작게 말했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당신은 늘 미안하다고는 잘해.”
그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맞았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늦으면 미안하다고 했고, 잊으면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가 서운해 보이면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뒤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사과는 했지만 습관은 바꾸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관계를 회복시키는 시작일 뿐인데,
나는 그 말을 끝처럼 써왔다.
“이번엔 말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녀는 바로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뭘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대답이 늦었다.
막연히 잘하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 노력할게, 달라질게,
이런 말은 너무 많이 쓰이고 너무 쉽게 잊힌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일단 주 2번은 같이 저녁 먹자.
늦어도 그날은 미리 말하고,
가능하면 8시 전에는 들어올게.”
그녀는 말없이 나를 봤다.
“그리고 주말 하루는 각자 쉬더라도,
하루는 같이 보내자.
꼭 밖에 나가자는 게 아니라 산책이라도.
카페라도.”
나는 조금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리고 자기 전에 휴대폰 보지 말고,
10분만 얘기하자. 오늘 어땠는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10분?”
“응. 길게 못 해도.
하루에 10분은 서로한테 쓰자.”
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네가 바라는 거 있어?”
그녀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예전 같으면 어색해서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괜히 농담을 하거나,
케이크를 자르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렸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해결해야 할 일처럼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야?”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당신은 늘 해결책을 말했어.
그럼 그렇게 하지 말지.
회사에 얘기해. 병원 가. 쉬어.
그냥 그렇게 말했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녀가 잠시 숨을 삼켰다.
“나는 그냥 내 편이 필요했던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같이 사는데도,
내가 혼자 버티는 것 같았어. 집안일도,
내 감정도, 우리 관계도.”
그 말에 나는 식탁 위의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집안일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무거운 장을 봐오고,
고장 난 전구를 갈았다.
하지만 내가 한 일만 기억하고,
그녀가 매일 해온 일들은 대충 지나쳤다.
청소가 되어 있는 집, 채워진 냉장고,
정리된 세탁물, 떨어지기 전에 사둔 휴지와 세제.
그것들은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였다.
나는 그것을 너무 오래 배경처럼 생각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그리고 곧 덧붙였다.
“이 말도 너무 부족한 거 알아.”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잘한 건 없어. 나도 닫아버렸으니까.”
“아니야.”
“아니. 나도 당신한테 점점 말 안 했어.
화나도 그냥 넘기고, 서운해도 혼자 삭였어.
그러다 보니까 나중엔 당신이
뭘 해도 곱게 안 보이더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당신이 늦게 들어오면 ‘또’라는 생각부터 들고,
소파에서 휴대폰 보면 ‘역시’라는 생각부터 들고,
주말에 쉰다고 하면
‘나는?’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그녀의 외로움이
구체적인 모양을 갖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냥 화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 집 안에서,
우리 관계 안에서 오래 혼자였다.
그날 우리는 케이크 초를 한참 끄지 못했다.
초가 거의 반쯤 녹았을 때, 그녀가 말했다.
“불 끌까?”
“응.”
우리는 동시에 입김을 불었다.
초가 꺼지고, 작은 연기가 올라왔다.
그 연기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도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닐지 모른다고.
아직 연기가 남아 있고,
아직 따뜻한 냄새가 남아 있다면,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날 밤 한 번의 대화로
모든 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휴대폰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그녀는 이미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커피 있어?”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날은 물었다.
“나도 도울 거 있어?”
그녀는 나를 보더니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컵 꺼내줘.”
나는 찬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별것 아니었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별것 아닌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주 수요일,
나는 7시 40분에 집에 들어왔다.
약속한 대로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회사에서는 조금 불편했다.
팀장이 퇴근하려는 나를 보며
“오늘은 일찍 가네?”라고 했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
집에 일이 있다는 말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동안 나는 회사 일을 집보다 자주 먼저 두었다.
집은 늘 기다려주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도 돌보지 않으면 낡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다.
대화는 아직 어색했다.
“오늘은 어땠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보았다.
아마 내가 정말 듣고 싶은 건지,
그냥 약속을 지키는 척하는 건지 살피는 눈이었다.
“오늘 팀장이 좀 짜증 나게 했어.”
예전 같으면
나는 바로 해결책을 말했을 것이다.
“그럼 말하지 그랬어.”
“너무 받아주지 마.”
“팀장이 문제네.”
그 말들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삼켰다.
대신 말했다.
“짜증 났겠다.”
그녀가 젓가락을 멈췄다.
“응. 짜증 났어.”
그리고 그녀는 조금 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속상했는지,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는지.
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내가 꽤 잘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듣는 척하면서
내 머릿속에서 답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내가 해줄 조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러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말했다.
“오늘 고생했네.”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아주 작고 희미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나를 이상하게 안도하게 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연습했다.
처음엔 잘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늦는 날이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서운함을 바로 말하지 못했다.
하루 10분 대화는 어떤 날은 3분 만에 끝났고,
어떤 날은 서로 피곤해서 대충 넘겼다.
한 번은 내가 또 소파에서 휴대폰을 오래 봤다.
그녀가 말했다.
“휴대폰에 뭐 재밌는 거 나와?”
예전 같으면 나는
“잠깐 보는 거야”라고 했을 것이다.
그날도 그렇게 말할 뻔했다. 하지만 멈췄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미안. 습관이네.”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습관 고치기 어렵지?”
“응. 어렵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고쳐야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내 쪽으로 조금 돌아누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이불 위에 있었다.
손끝이 닿았을 때, 그녀가 피하지 않았다.
그 작은 접촉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내 손안에 넣었다.
“손 차네.”
내가 말했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원래 그랬잖아.”
나는 웃었다.
“그러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있었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예전의 침묵과 달랐다.
서로를 피하는 침묵이 아니라,
다시 조심스럽게 가까워지는 침묵이었다.
몇 주 뒤, 우리는 주말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
동네 공원이었다. 대단한 곳도 아니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나는 커피 두 잔을 샀고,
그녀는 작은 빵집에서 소금빵을 샀다.
벤치에 앉아 빵을 나눠 먹으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 예전에 이런 거 자주 했는데.”
“그러게.”
“왜 안 했을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바빠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안 한 것도 많았던 것 같아.”
그녀는 나를 보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사랑도 귀찮아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아.
그래서 바쁘다는 말 뒤에 숨었나 봐.”
그녀는 빵을 조금 뜯어먹으며 말했다.
“나도 그랬어.
서운하다고 말하는 것도 귀찮아졌어.
말해봤자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미안해.”
“또 미안해?”
그녀가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해?”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말보다,
오늘 뭐 할 건지 말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계란말이?”
“응.”
“접기 말고?”
“노력해 볼게.”
그녀가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계란말이를 했다.
역시 옆구리가 터졌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그걸 집어 들고 말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네.”
나는 웃었다.
“맛은 있을걸.”
그녀가 한 입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에서 정성이 느껴져.”
“모양은?”
“...”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걸.
어쩌면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신혼의 우리는 다시 될 수 없다.
그때의 설렘, 그때의 서툰 다정함,
그때의 가벼운 기대는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다.
우리는 그 사이 나이를 먹었고,
서로에게 실망도 했고, 서로를 외롭게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끝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같이 웃을 수 있는 기억.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용기.
미안하다는 말 뒤에 행동을 붙여보려는 노력.
그리고 서로의 하루를 다시 묻는 작은 습관.
결혼 5년 차의 사랑은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보다 더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은 처음에는 마음이 시켜서 한다.
하지만 오래된 사랑은 선택으로 지켜야 한다.
퇴근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
식탁에 마주 앉는 일.
휴대폰을 내려놓는 일.
오늘 어땠냐고 묻는 일.
상대가 대답할 때 끝까지 듣는 일.
차가운 손을 다시 잡아보는 일.
그런 일들이 결혼을 다시 살린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방향 전환이.
그날 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불을 끄기 전 그녀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점심에 먹은 음식,
퇴근길에 본 노을,
계란말이가 또 실패한 것까지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그냥”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오늘 좀 괜찮았어.”
내가 말했다.
그녀가 나를 봤다.
“왜?”
나는 이불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랑 얘기해서.”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조용했지만 예전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부부가 멀어지는 건
사랑이 한순간에 사라져서가 아니다.
묻지 않는 날들이 쌓이고,
듣지 않는 밤들이 쌓이고,
잡지 않는 손들이 쌓여서다.
그러니 다시 가까워지는 것도
결국 반대일 것이다.
묻는 하루.
듣는 밤.
다시 잡는 손.
그 작고 느린 것들로,
우리는 다시 부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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