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친절이고, 애매하게 남겨두는 것은 불친절이다.”
— 브레네 브라운 , 『Dare to Lead』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긴 하는데 그 마음이 아주 작거나 아니면 나보다 훨씬 느슨한 방식으로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루 종일 그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테니까.
내가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며 ‘오늘은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해볼까’ 고민하는 동안, 그는 짧게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으니까.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점이 좋았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과장된 표현으로 나를 들뜨게 하지 않는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나는 그의 차분함을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 알았다.
차분함과 무심함은 아주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우리가 만난 지 여섯 달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자주 혼자 서운했다.
그는 크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 정도면 괜찮은 남자 아니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런데 연애가 꼭 큰 잘못 때문에 힘든 건 아니었다.
나는 가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만나면 좋아?”
“내가 보고 싶을 때가 있긴 해?”
“너한테 나는 어떤 사람이야?”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너무 애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보일까 봐, 묻지 못했다. 대신 나는 돌려 말했다.
“오늘 회사 근처에 예쁜 카페 생겼더라.”
“주말에 날씨 좋대.”
“요즘 네가 좋아하는 영화 개봉했던데.”
그럴 때마다 그는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 되면 보자.”
시간 되면.
그 말은 참 이상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듣고 나면 마음 한쪽이 접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시간이 되면’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없더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토요일 오후.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역 근처에 있는 작은 북카페에서 만났다.
원래는 점심을 먹고 근처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가 회사에서 급하게 확인해야 할 자료가 생겼다고 했다.
“많이 걸려?”
내가 물었다.
“아마 삼십 분 정도.”
그는 미안하다는 듯 노트북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한 표정은 분명 있었지만 그 말은 여전히 짧았다.
“괜찮아. 여기서 기다릴게.”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조금 괜찮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한 번쯤은 “미안해, 그래도 끝나면 바로 너랑 시간 보낼게”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늘 필요한 말만 했다.
“고마워.”
그는 주문한 커피를 내 앞에 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가에는 혼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고 벽 한쪽에는 독립출판물과 소설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때 그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 이거.”
내가 빌려줬던 소설책이었다.
“다 읽었어?”
“응.”
“어땠어?”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았어.”
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끝이야?”
“응?”
“좋았어. 이 네 글자가 감상평 전부야?”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 좋았어. 진짜로.”
그답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짧은 대답 안에 갇혀 있었다.
나는 책을 받아 가방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창밖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바빠 보였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춰 있는 사람 같았다.
삼십 분이 지나도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미안. 조금만 더.”
그가 말했다.
“응. 괜찮아.”
나도 참 이상했다.
괜찮지 않을수록 더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덜 초라해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림을 티 내지 않으려고 그가 돌려준 책을 펼쳤다.
내가 좋아했던 문장이 어디 있었는지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몇 장을 넘기는데 책 사이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문득 그를 바라보니 일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종이를 주워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문장을 본 순간 그대로 멈췄다.
‘그녀가 이 책을 빌려줬다.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나도 기억해두고 싶었다.’
숨이 잠깐 멈췄다.
내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씨였다.
반듯하고 조용한 글씨.
말할 때처럼 길지 않은 문장들이 종이 위에 천천히 놓여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메모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웃을 때 오른손으로 컵을 만진다.
긴장하면 말을 빨리 하고 서운하면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말할 때는 대체로 괜찮지 않은 것 같다.’
손끝이 굳었다.
나는 내가 들킨 것 같았다.
아니, 들킨 게 아니라 발견된 것 같았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접어두었다고 생각한 마음의 모서리를 그가 조용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메모지는 책갈피처럼 접혀 있었다.
아마 그가 책을 읽다가 표시해 둔 종이였을 것이다.
일부러 내게 보여주려고 넣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기엔 그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고 그런 식으로 마음을 전할 만큼 능숙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읽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첫 문장을 봐버린 뒤였다.
그 안에 내가 있었고 그 안에 그의 진심이 있었다.
책장을 몇 장 더 넘기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문장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좋아할 것 같은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직접 적힌 문장은 아니었다.
기다림과 서툰 마음에 관한 문장이었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그의 짐작이 너무 정확해서 나는 오히려 더 서러워졌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아주 오래.
그런데 왜 나는 혼자였을까.
나는 책을 덮었다.
기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무심하게 대했던 게 아니라 표현하지 못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혼자 의미를 붙이던 날들 뒤에 그의 마음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기쁨보다 먼저 올라온 건 억울함이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렇게 우연히 알아야 했을까.
왜 사랑받고 있었는데도 외로워야 했을까.

그때 그가 노트북을 닫았다.
“미안. 다 됐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응.”
“많이 기다렸지?”
평소라면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이 내 턱끝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방금 본 메모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참아온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 탓인지 모르겠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조금.”
그가 멈칫했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 말고.”
그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커피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웃을 때 오른손으로 컵을 만진다고 적혀 있던 그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그런 걸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떨고 있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나 오늘 조금 서운했어.”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네가 바쁜 거 알아. 그런데 나는 가끔 네가 나를 그냥 시간 날 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 같아.”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알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게 들렸다.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
우리는 그 모든 소리 사이에서 조용히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가방 위에 놓인 책을 바라봤다.
“너는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진짜 괜찮은 줄 알아?”
그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를 봤다.
“그럼 왜 모르는 척해?”
그는 한참 만에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말은 너무 그다웠다.
“몰라도 물어봐야지.”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무것도 안 하면 나는 네가 나에게 관심 없는 줄 알아.”
그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무언가를 잡고 싶지만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네가 떠날까 봐 겁나.”
그가 낮게 말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네가 지치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말하려고 하면 자꾸 늦어.
이미 네가 서운해진 뒤에야 알아.
그래서 더 말하기가 어려워져.”
그토록 듣고 싶었던 진심이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마음이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진심이 있었다는 사실이 모든 서운함을 없애주지는 않았다.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외로웠던 시간이 전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 선 느낌은 들었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고
나도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 같았다.
나는 책을 조심스럽게 밀어주었다.
“이거.”
그가 책을 보았다.
“책 사이에 메모 있었어.”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당황한 듯 책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봤어?”
“응. 일부러 본 건 아닌데 떨어졌어.”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끄러운 사람처럼 들키고 싶지 않은 일기를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조금 굳었다.
“미안.”
“미안할 일은 아닌데.”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근데 조금 속상했어.”
그가 천천히 나를 봤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 한 번쯤 말해주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웃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나는 네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고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 역시 그 답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말해줘야 해.”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이 있으면 있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미안하면 왜 미안한지.
고마우면 뭐가 고마운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
나는 그 대답이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잘할게.
반드시 바뀔게.
다시는 안 그럴게 같은 말보다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달라질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하루아침에 서운함을 내려놓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보겠다는 말은 시작처럼 들렸다.
우리는 그날 전시를 보러 가지 못했다.
대신 북카페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려고 했고 나는 평소보다 괜찮다는 말을 아꼈다.
어색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 책, 너한테 돌려주기 싫었어.”
“왜?”
“네가 좋아하는 책이라서.”
“그게 이유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읽고 있으면 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을 잡고 걸었고 누군가는 혼자 이어폰을 끼고 걸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내 마음 한쪽은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
평소보다 조금 긴 문장이었다.
「오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냥 기다리게 한 게 아니라,
네 마음을 또 혼자 두게 한 것 같아서 미안했어.
그리고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을 때가 있어.
말이 늦어서 미안해.」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눈물이 날 만큼 화려한 고백은 아니었다.
세련된 표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방식으로는 꽤 큰 걸음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그러다 짧게 보냈다.
「나도 네가 말해줘서 좋았어.」
전송 버튼을 누르고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조금 지친 얼굴이었지만 전보다 덜 외로워 보였다.
사랑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랑은 가끔 말이 되어야 하고 손길이 되어야 하고 늦기 전에 닿아야 한다.
마음속에 아무리 많은 문장이 있어도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끝내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나 역시 더 이상 서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이후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사랑을 너무 조용히 적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에게 말해줄 생각이다.
사랑은 혼자 간직하는 메모가 아니라 둘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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