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게 흘러간 적이 없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그의 그런 모습에 반한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을 일부러 헷갈리게 하지 않는 사람.
눈빛으로 떠보고,
말끝을 흐리며 밀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느리게 반응하는 사람.
그는 늘 한 박자 늦었다.
회의실에서 누가 농담을 하면
늘 남들보다 반 박자 늦게 웃었고,
단체 채팅방에 이모티콘이 쏟아질 때도 꼭 마지막쯤에 “ㅋㅋ”를 보냈다.
메뉴를 고를 때도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말해놓고,
정작 식당 앞에 도착하면 “여기 매운 거 많지 않나?” 하고 뒤늦게 걱정했다.
그런 느림이 처음엔 편했다.
급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좋았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서 좋았다.
누구에게나 적당히 친절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다.
괜히 잘해주는 척하지도 않았고,
상대가 오해할 만한 말을 쉽게 던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처음 그를 좋아하게 된 순간은 아주 별것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퇴근 시간이었다.
회사 앞 횡단보도에는 우산을 든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다.
나는 그날 하필 우산을 안 가져왔다.
아침에는 하늘이 멀쩡했는데,
오후부터 비가 쏟아졌다.
건물 입구에서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옆으로 다가왔다.
“우산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편의점까지 뛰어가려고.”
그가 자기 우산을 펼치며 말했다.
“같이 가. 어차피 역까지 가잖아.”
그 말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았다.
마치 대단한 배려를 베푸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를 담은 것도 아니라는 듯.
그냥 당연한 일을 하듯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는 자기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였다.
나는 그걸 봤지만 모른 척했다.
고맙다고 말하면 그가 괜찮다고 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너 되게 착하다.”
그가 앞만 보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데.”
“별거 맞아. 우산 같이 쓰는 거 은근히 귀찮잖아.”
“같은 방향인데 뭐.”
나는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
“너 같은 사람이 남자친구면 편하겠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남자친구가 우산 담당이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그는 정말 몰라서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웃어버렸다.
“됐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아라.”
그도 따라 웃었다.
그때는 그런 그가 귀여웠다.
내가 조금만 더 티를 내면 알아차리겠지.
조금 더 자주 옆에 있고
조금 더 자주 웃어주고
조금 더 직접적인 말을 던지면 언젠가는 눈치채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자주 앉았다.
회의실에 들어가면 빈자리가 많아도 그의 옆 의자를 골랐다.
점심을 먹을 때도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이나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 걸을 때도 어느새 그의 옆으로 걸었다.
처음엔 그도 별생각 없어 보였다.
“여기 앉아도 되지?”
“응.”
끝.
정말 끝이었다.
보통 누가 자꾸 옆자리에 앉으면 한 번쯤은 의식하지 않나.
‘왜 자꾸 내 옆에 앉지?’ 하고 생각하지 않나.
그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의 옆에 앉으면
그는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어줬고,
내가 커피를 들고 오면
컵 놓을 자리를 비워줬다. 친절했다. 그런데 너무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점점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회의가 끝난 뒤 내가 말했다.
“너 오늘 발표 잘하더라.”
그가 노트북을 닫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좀 버벅거렸어.”
“아닌데? 되게 차분해서 좋았어.”
“팀장님 표정 안 좋던데.”
“원래 표정 안 좋으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가.”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나는 네가 발표할 때 목소리 좋더라.”
그가 나를 봤다.
“목소리?”
“응. 안정적이야.”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녹음해서 들어보면 이상하던데.”
나는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지금 목소리 분석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칭찬하면 그냥 고맙다고 하면 돼.”
그제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마워.”
나는 그의 그런 반응에 또 웃고 말았다.
좋아하는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답답해도 귀엽고, 서운해도 웃음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답답함을 즐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내가 아무리 티를 내도 그는 늘 제자리에 있었다.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도 그는 너무 정직하게 답했다.
나: 오늘 점심 맛있었어?
그: 응. 괜찮았어.
나: 너랑 먹어서 그런가, 더 맛있던데.
그: 그 식당 원래 괜찮아. 다음에 또 가도 될 듯.
그 식당이 원래 괜찮은 걸 누가 모르냐고.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날에는 이렇게 보냈다.
나: 너 오늘 셔츠 잘 어울리더라.
그: 아 그래? 할인해서 산 건데.
나: 할인 말고. 잘 어울린다고.
그: 가성비 좋았어.
나는 휴대폰을 덮었다.
진짜 일부러 이러나?
그런데 그를 보면 일부러 그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 자기 셔츠의 가격 대비 효율을 말하고 있었다.
한 번은 더 직접적으로 말한 적도 있었다.
퇴근 후 둘이 카페에 들렀다.
원래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다들 갑자기 일이 생기거나 약속이 있다며 빠졌다.
나는 속으로 조금 기뻤다.
드디어 단둘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그가 말했다.
“오늘 사람들이 다 바쁘네.”
나는 빨대를 만지며 대답했다.
“그러게. 그래도 난 좋은데?”
“왜?”
“단둘이 있으니까.”
그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나를 봤다.
나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제발 알아들어라.
제발 이번엔.
그는 잠깐 멈추더니 말했다.
“시끄럽지 않아서?”
나는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응. 뭐, 그것도 있고.”
“나도 조용한 데가 좋긴 해.”
나는 그날 집에 와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야, 나 진짜 미치겠다.
친구: 왜 또 그 눈치 없는 분?
나: 단둘이 있어서 좋다고 했더니 조용해서 좋냐고 묻더라.
친구: 와. 재능이다.
나: 이 정도면 나 싫은 거 아닐까?
친구: 싫으면 단둘이 카페를 왜 가.
나: 그럼 왜 몰라?
친구: 모르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걸 수도 있어.
나: 뭐가?
친구: 착각하는 거.
그 말을 읽고 나는 잠시 조용해졌다.
착각하는 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사람을 쉽게 단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가 조금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나 좋아하나?” 하고 생각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건 좋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 좋은 점 때문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내가 보내는 신호는 전부 그의 앞에서 힘을 잃었다.
“너랑 있으면 편해.”
“나도 네가 편해.”
“너 같은 남자친구 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주말에 뭐 해? 나 심심한데.”
“쉬어야지. 평일에 피곤했잖아.”
나는 점점 웃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그런데 그 마음을 계속 나 혼자만 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음도 계속 들고 있으면 무겁다.
처음엔 설렘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티를 내야 하지.
내가 왜 계속 먼저 웃고, 먼저 묻고, 먼저 다가가야 하지.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아닌 척하는 걸까.
이 질문이 생기자 예전엔 귀엽던 그의 느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놀릴 때마다 더 그랬다.
점심시간에 선배가 말했다.
“너희 둘은 왜 맨날 같이 앉아?”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시는데
그는 너무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리가 그렇게 되네요.”
자리가 그렇게 되네요?
내가 일부러 네 옆에 앉는 건데?
선배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래? 자리가 알아서 움직이나?”
나는 괜히 웃었다.
“그러게요.”
그는 아직도 눈치가 없었다.
아니, 눈치를 차릴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또 한 번은 회식 자리였다.
다들 술이 조금 들어간 상태였고 분위기가 꽤 풀려 있었다.
옆자리 동료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둘이 은근 잘 어울려요.”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런 말이 나오면 보통 사람은 상대 반응을 본다.
그도 나를 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말했다.
“저희 가요?”
“네. 둘이 같이 있으면 편해 보여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희 둘 다 조용해서 그런가 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날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동료는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말했다.
“아니, 그 조용한 느낌이 잘 맞는다고요.”
그는 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성향이 비슷하다는 뜻이군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날 회식이 끝나고 나는 일부러 조금 늦게 나왔다.
사실 그가 나를 기다려주길 바랐다.
아니, 적어도 “같이 갈래?” 정도는 말해주길 바랐다.
그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괜히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가 말했다.
“택시 잡았어?”
“아니. 아직.”
“늦었는데 조심히 가.”
조심히 가.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서운했다.
나는 술기운 때문인지 그동안 쌓인 답답함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다.
“너는 항상 그 말만 하더라.”
그가 나를 봤다.
“무슨 말?”
“조심히 가.”
“밤이니까 조심히 가야지.”
정말, 이 사람은 끝까지 이런 식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예전처럼 밝지 않았다.
“가끔은 조심히 가 말고, 같이 가자고 해도 되잖아.”
그는 눈을 깜빡였다.
“같이?”
“응.”
“방향 다르잖아.”
나는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방향.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렇게 현실적이었다.
같이 가자는 말 안에 있는 마음보다,
집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이 먼저 보이는 사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향 다르지.”
그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화났어?”
“아니.”
“근데 표정이…”
“아니야. 나 택시 잡을게.”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럼 잡힐 때까지 같이 기다릴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왜 늘 이렇게 늦을까.
내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같이 가자는 말이었지
내가 서운한 티를 낸 뒤에야 기다려주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기다려준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풀리는 내가 싫었다.
“됐어. 먼저 가.”
“괜찮은데.”
“나도 괜찮아.”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택시가 도착했고
나는 차 문을 열기 전 그를 한 번 봤다.
그는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더 답답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걱정이라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걱정은 다정하면서도 잔인했다.
관심은 있는데, 확신은 주지 않는다.
챙겨주긴 하는데, 붙잡지는 않는다.
곁에 있긴 한데,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는 차에 타며 말했다.
“너 진짜 끝까지 모른다.”

그가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차 문을 닫았다.
택시가 출발하고 나서야 눈물이 조금 났다.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모르면 이제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멀어지기로 했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나를 덜 초라하게 만들기 위한 작은 선택이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도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먼저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웃긴 했지만 예전처럼 오래 웃어주지 않았다.
메시지도 먼저 보내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그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게 더 아팠다.
내가 옆에 앉지 않아도 그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아도 그는 평소처럼 일을 했다.
내가 웃지 않아도,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역시 나 혼자였나.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다 며칠 뒤 그가 먼저 다가왔다.
“오늘 점심 뭐 먹어?”
나는 서류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같이 갈래?”
그 말에 심장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웃으며 “좋아”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나 오늘 다른 사람들이랑 먹기로 했어.”
그가 잠깐 멈췄다.
“아, 그래?”
“응.”
“알겠어.”
그는 돌아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너무 차갑게 말했나.
아니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다가갔는데.
이번엔 그가 조금 느껴봐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싫어서 멀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아팠다.
며칠 뒤, 카페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는 뒤늦게 들어와 내 옆에 섰다.
“요즘 바빠?”
그가 물었다.
“그냥.”
“회의실에서 요즘 다른 데 앉더라.”
나는 놀라지 않은 척했다.
“자리 비어 있길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는 그가 뭔가 더 말해주길 기다렸다.
왜 내 옆에 안 앉냐고.
혹시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냐고.
예전처럼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또 조용해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신경 쓰였어?”
그가 나를 봤다.
“조금.”
“왜?”
그는 대답을 찾는 듯 잠시 눈을 내렸다.
“그냥… 요즘 네가 좀 멀어진 것 같아서.”
나는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이제야?
이제야 느꼈어?

나는 커피가 나왔다는 알림을 듣고 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
“멀어진 게 아니라, 그만 다가가는 중이야.”
그는 그대로 멈췄다.
“무슨 뜻이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 사람은 끝까지 물어본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너한테 계속 티 냈잖아.”
그가 아무 말도 못 했다.
“옆에 앉고, 먼저 연락하고, 같이 있으면 좋다고 말하고, 너 같은 사람이 남자친구면 편하겠다고 말하고.”
나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런데 너는 계속 농담처럼 넘겼어.”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네가 원래 사람한테 다정한 줄 알았어.”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모두한테 그랬어?”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 진짜 몰랐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확신이 없었어.”
확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답답함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는 확신이 있어서 그랬을 것 같아?”
그가 나를 봤다.
“나도 지금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겁났어.”
나는 커피 컵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나는 다가갔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이 미웠다.
예전에는 그의 침묵이 신중함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침묵이 나를 혼자 두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건 대단한 고백이 아니었어.”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냥 너도 나한테 조금은 마음이 있다는 표시였어. 한 번쯤은 나를 붙잡아주는 말. 한 번쯤은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말.”
그가 낮게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
분명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수십 번 상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왜 이제야.
나는 웃었다. 슬프게.
“진짜 너무 늦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늦었어?”
“조금.”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알았다.
내가 아직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가갈 힘은 줄어들었다는 걸.
그가 말했다.
“미안해. 내가 착각하는 사람 될까 봐…”
“알아.”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네가 일부러 나를 무시한 건 아닌 거 알아. 네가 나쁜 사람 아닌 것도 알아.”
그는 나를 바라봤다.
“근데 아는 것과 안 아픈 건 다르더라.”
그는 고개를 숙였다.
카페 안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커피를 들고나가고,
직원은 컵홀더를 정리했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데,
내 마음만 그 자리에 멈춘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눈치 없는 사람이라서 답답했던 게 아니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계속 용기를 냈는데, 너는 계속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게 답답했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가 없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지친 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내가 계속 혼자였다는 거야.”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 같았다.
나는 그동안 혼자 좋아했고, 기대했고, 실망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다.
좋아하면 티가 나고,
티가 나면 알아주고,
알아주면 시작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좋아해도 움직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기다리다 지쳐 먼저 마음을 접는다.
나는 말했다.
“나 시간이 좀 필요해.”
그는 급히 물었다.
“기다리면 돼?”
나는 그를 봤다.
그 질문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더 그답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야.”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알겠어.”
나는 커피를 들고 먼저 카페를 나왔다.
밖은 흐렸고,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나는 길을 걸으며 이상하게 울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아주 조용했다.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며칠 동안 우리는 어색하게 지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나를 먼저 챙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가 끝난 뒤 그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잠깐 얘기할 수 있어?”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회사 건물 뒤 작은 벤치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했다.
“요즘 계속 생각했어.”
나는 말없이 들었다.
“나는 내가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그를 보았다.
“완전히 몰랐던 건 아니야.
가끔은 혹시 그런 건가 싶었어.
그런데 그 순간마다 내가 먼저 아니라고 해버렸어.”
“왜?”
그는 잠시 침묵했다.
“너 같은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답답함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래서 네가 던진 말들을 다 농담으로 만들었어. 그래야 내가 착각한 사람이 안 되니까.”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도 힘들었겠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가 힘들었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들었던 건 아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마음은 이해돼.”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근데 나는 네 불안 때문에 계속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느 순간엔 선택해야 하잖아. 다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낮게 말했다.
“나 이제는 피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웃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좋아하는 마음은 남아 있었지만,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 자존심을 계속 접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나한테 확신을 달라고 하지 말고, 네가 먼저 보여줘.”
그가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모른 척하지 않는 것부터.”
“응.”
“내가 다가오길 기다리지만 말고, 너도 다가오는 것.”
“응.”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네가 궁금하면 묻는 것.”
그는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면, 내가 너를 좋아하는지 확인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네 마음도 표현해 줘.”
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좋아해.”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전처럼 늦게 도착한 사과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서툴지만 피하지 않으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 말하는 데 얼마나 걸린 거야?”
그가 작게 웃었다.
“너무 오래.”
나도 결국 웃었다.
“알긴 아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바로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게 더 현실적이었다.
좋아한다는 말 하나로 모든 게 처음처럼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졌다.
그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그: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나: 갑자기?
그: 갑자기가 아니라, 같이 먹고 싶어서.
나: 오. 많이 늘었네.
그: 연습 중이야.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
회의실에서도 그는 내 옆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렸다.
내가 들어가면 슬쩍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여기 앉을래?”
나는 일부러 물었다.
“왜?”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말했다.
“네가 옆에 앉으면 좋아서.”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여전히 그는 서툴렀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내가 보내는 마음을 농담으로만 돌려보내지 않았다.
내
가 서운하면 이유를 물었고,
자신이 겁날 때도 숨기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나도 배웠다.
좋아하는 마음을 꼭 퀴즈처럼 던질 필요는 없다는 걸.
상대가 알아맞혀주길 기다리다가 나만 지칠 수도 있다는 걸.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마음을 숨기는 것은 다르다는 걸.
2026.06.25 - [연애심리/연애사연] - 미안함일까?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는 두 사람
미안함일까? 헤어지자는 말을 못하는 두 사람
우리는 이미 끝난 걸 알면서도,아무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별이 한순간에 찾아온다고 생각한다.큰 싸움이 있었거나.배신이 있었거나.거짓말이 들켰거나.하지만 우리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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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1 - [연애심리/연애사연] - 이혼도 아닌데 남편이 따로 살자고 했다
이혼도 아닌데 남편이 따로 살자고 했다
"우리는 이혼한 것도 아닌데, 남편은 집을 나갔다."처음에는 한 달만인 줄 알았다.남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 잠깐 혼자 살아보고 싶어." 나는 웃었다.농담인 줄 알았다.오십 대 후반의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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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7 - [연애심리/연애사연] - 결혼하고 싶은 여자, 걱정부터 하는 남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걱정부터 하는 남자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아마 그게 문제인지도 모른다.정말 사랑하지 않았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미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매번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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